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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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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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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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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正)-반(反)-합(合)’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은 현상이나 사물을 관조(觀照)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철학자 헤겔의 방식을 빌리면 논리 전개를 위한 첫 명제인 ‘테제(these)’는 이에 저항하는 ‘안티테제(antithese)’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은 치열한 싸움을 통해 모순이 사라진 통일체인 ‘진테제(synthese)’로 향한다. 한 사안을 놓고 진통과 갈등을 겪더라도 결국은 진일보한 또 다른 대안을 찾아나간다는 논리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역사와 인류는 발전할 수밖에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제도나 법도 마찬가지의 순리와 법칙을 따르면서 전진하는 셈이다.

미국 테러관련법 시행 후 부작용
인격권 보장 위한 원칙 고민해야

 최근 국회를 통과한 테러방지법을 둘러싼 정치적·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지만 흥분은 금물이다. 인터넷의 도움으로 확보된 개인의 사상적 해방과 정치적 자유가 이를 통제하려는 국가와 조직에 의해 탄압을 받을 수 있다는 반론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영혼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은 “과거 전제군주도 상상하지 못한 최악의 전방위적 감시·통제 체제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한다.

 2013년 미국에서 먼저 불거진 논쟁부터 살펴보자.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중앙정보국(CIA)에 근무했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정부의 무차별적인 도청과 개인정보에 대한 불법 수집의 실상을 폭로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개정된 미국 애국법 이 시행된 이후 나타난 공권력의 부작용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애국법은 유선·구두·전자 통신에 대한 감청 대상과 테러 혐의를 받는 외국인의 구금기간을 대폭 늘린 게 특징이다. 스노든은 미국 정부가 프리즘(PRISM)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인들은 물론 세계 각국의 정상들까지 도청했다며 관련 내용이 담긴 극비자료를 공개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5000건가량의 비밀 자료가 누출된 것으로 전해진다. 애국법 개정-정부의 불법 도청-외국인 테러리스트 추적 위한 프리즘 개발-무차별 도청-폭로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테러방지법 역시 미국의 9·11 테러가 계기가 됐다.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가 국제테러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우리 역시 안전지대가 아니다”고 설명한다. 정부나 국회의원들의 입법이 그렇듯 이번에도 규제와 처벌 위주다. 국가정보원 출신 이철우 의원이 마지막으로 대표 발의한 법안은 국민을 감시 대상으로 분류했다.

 몇 년 전 아랍의 민주화 혁명 이후 나온 외신 보도는 정부 감시의 위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독재 정권에 대한 시위대의 저항이 거세지자 집권층은 각종 도·감청 기계를 사들여 국민을 감시했다는 것이다. 아랍 국가의 정보기관들은 “미국의 침공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터넷 등 각종 정보기술(IT)이 자유를 위한 도구이기보다는 억압을 위한 수단이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국정원도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인터넷 댓글 등을 조작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고,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았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테러방지법을 비판하고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지지하는 여론의 배경에는 국정원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스노든의 제보를 받고 관련 내용을 기사화했던 가디언지 전 기자 글렌 그린월드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No place to hide)』는 책을 통해 국가 권력에 대한 시민의 감시를 주문했다. 국민의 인격권이 헌법으로 보장받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적어도 무차별적 대량 감시가 설 장소가 없다는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테러방지법을 재협상하고 악법 조항을 철폐하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기대난망이다.

 법이 시행되면 우리가 주고받았던 통화와 각종 문자메시지, 금전거래 내역, 머릿속에 들어 있던 생각은 투명상자 속에 들어가게 된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우리는 어떤 반작용을 겪게 될까.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