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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부와 유승민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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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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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사람들이 다 믿는 생생한 거짓말도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아무도 안 믿는다. 이솝 우화(寓話)의 메시지는 머리보다 가슴을 파고든다. 실제 언제, 어떤 마을에서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했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고개를 끄덕일 만한 상식과 지혜, 교훈만으로 충분하다. 우화적 진실은 이런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구의 유승민 의원을 공천에서 쳐내고 싶어 한다는 얘기는 ‘우화적 진실’의 영역에 속한다.

박 대통령, 비박의 중심 쳐낼까
“예정론은 예정대로 가지 않아”

청와대 핵심이나 친박근혜 세력이 작성했다는 공천 살생부 논란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도 좋겠다. 문제가 불거지자 김무성 대표와 정두언 의원 사이의 진실게임을 새누리당 지도부가 덮어버렸다. 누가 양치기 소년인가. 나는 김무성과 정두언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얘기를 듣고 전했던 김원용 전 성균관대 교수를 접촉했다. 그는 논란 속에 잠시 세상과 연락을 끊고 있다.

- 김무성과 정두언 중 누가 거짓말을 했나.

“김 대표는 내게 청와대 핵심, 친박 세력 운운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살생부란 표현도 하지 않았다. 정 의원과 만났을 때 나는 그런 말을 전한 적이 없다.”

- 유승민·정두언 의원뿐 아니라 친박계 의원들도 포함된 현역 의원 40명 물갈이 얘기는 있지 않았나.

“그 얘기는 있었다. 이쪽과 저쪽 세력을 균형 있게 안배해 탈락시키는 건 일종의 정치권 커먼센스(상식) 아닌가.”

- 당신이 공작과 음모에 능한 폴리페서(정치교수)란 비판이 있다.

“음모론은 가당치 않다. 예정론은 예정대로 가지 않는다. 사람 간의 우연한 만남과 선의, 정치인들의 욕망과 과장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비효과가 난 것 같다. 정치에서 기획과 의도는 허망한 것이다.”

살생부가 허구라 해서 유승민을 겨냥한 공천 칼날이 무뎌진 건 아닐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한국의 안전보장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산을 세계에 보여주려 했다.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검토 등으로 김정은·시진핑의 허를 찔렀다. 미·중 협상이 서둘러 진행되고 유엔의 고강도 대북제재가 탄생한 데엔 박 대통령의 냉엄한 성정과 결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 이 연장선상에서 총선 후 국정운영에 방해가 될 만한 세력을 가차 없이 쳐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박근혜 대 유승민 게임’은 시대정신의 전환기를 맞은 한국 정치의 빅 이벤트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집권세력은 무조건 한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집권당 원내대표가 행정부를 견제·보완하는 데 얼마만큼 자율성을 가질 수 있나?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국 정치에서 국정책임론과 입법자율성의 허용 한계를 4·13 총선에서 유권자가 정해 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친박과 비박의 대결은 그들만의 배신 논쟁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향한 가치논쟁으로 격상되어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이 다른 선택을 할지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즉 유승민을 살리는 것이다. 유승민을 원천 배제할 경우 대구에서 동정심이 확산되고 수도권으로 반발심리가 북상할 것이란 예상은 친박 쪽에서도 나온다. 박 대통령은 선거 승리를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가 있다. 대표적인 게 대선이 한창이던 2012년 가을에 발표했던 역사관 수정이다. 그는 한 달간 지지율이 하락하는 지옥 같은 시절을 관통한 뒤 “5·16과 유신은 헌법가치를 훼손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원칙의 일관성과 선거의 파격성을 묘하게 배합한다. 다음주부터 나오게 될 공천 배제자 명단에 유승민이 들어 있을까. 거기에 영향 미칠 변수는 ①대구의 민심 동향 ②야당의 물갈이 폭 ③친박 내 희생양의 규모 ④수도권 분위기 등일 것이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될 진실이 있다. 권력의 본성과 이를 제압하는 선거의 위대함에 관한 것이다. 유권자는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