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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TALK] 뭐든 빠르고 새로워야 한다는 시대에서 이탈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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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는 “일과 사람에 치어 녹초가 됐을 때, 옛 선비가 남긴 글귀를 하나씩 꺼내 읽으며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삶의 무게나 18세기 선비의 고민이나 본질상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흐린 세상 맑은 말』 정민 한양대 교수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56)는 자신을 ‘통역자’라 부른다. 그는 “한문 문장이란 게 아무리 좋아도 원문과 번역만 읽고 가슴으로 다가오진 않는다”며 “나는 한문학이 독자의 가슴 속에 파고들 수 있게 친절한 통역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전 인문학자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우리 한시 삼백수』를 포함해 최근작 『흐린 세상 맑은 말』까지 다수의 저서를 통해 한문학 읽기를 꾸준히 소개한 작가다. 창의력을 강조하며 너나없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찾기 원하는 지금, 그는 왜 옛 선현의 글을 꺼내 보여주며 읽으라 권하는 걸까.  

지금 고민, 수백년 전 선현들도 마찬가지
옛 시 한 구절이 현재 나를 돌아보게 해
잘 쓰려면 읽어라, 기술보다 사유가 먼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말하는 시대다. 한문학이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준다고 보나.

 “뭐든 빠르고 새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대다. 또 모두가 시간이 없다고 외친다. 해답이 뭘까. 더 빨라져야 할까. 절대 아니다. 오히려 강제적 멈춤, 강제적 이탈이 필요하다. 잠깐 멈추고 자기 좌표에 대해 성찰하고 확인해야 한다. 나는 옛사람의 지혜의 글들이 그 멈춤과 이탈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다.”

-옛글이 현대인의 속도를 멈추게 할 수 있나.

 “그때 거기나, 지금 여기나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가령 18세기를 보자. 명나라가 쇠하고 청나라가 일어선 시기다. 한족의 시대에서 오랑캐의 시대로 바뀌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사농공상의 전통적 위계질서가 전복되고, 지식인이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 삶은 혼란스러웠고 엇갈리는 정보 속에서 사람들은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를 고민했다. 현재의 우리를 둘러싼 문제와 다를 바 없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써내려간 글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흐린 세상 맑은 말』 서문에 담은 자기 고백이 인상적이다.

 “이 책을 쓴 때는 정말 힘들던 시기였다. 먹기만 하면 토하는 통에 몸무게가 20kg 이상 줄었을 정도였다. 교수로 부임한 지 5년째 되던 해였는데 일과 사람에 치여 완전히 녹초가 돼 있었다. 마음 둘 데 없던 그때 18세기 지식인이 남긴 청언소품(淸言小品)을 한 구절 한 구절 곱씹어 읽으며 내 삶을 비춰봤다. ‘나만의 고통이 아니구나, 시대를 초월해 모두가 겪는 일이구나’하는 생각이 위로가 됐다. 이 책은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게 해준 구절들, 내가 느낀 감동과 위로를 모은 일기 같은 책이다.”

-한문학을 전공한 이유는.

 “학창시절부터 한문 과목을 좋아했다. 한문 교과서에 실려있는 한시를 모조리 외고 다녔다. 한문 선생님이 한시 염하는 법(노래하듯 가락을 붙여 한시를 읽는 법)을 알려주면 집에 와서 오르간을 치며 다시 읊었다. 그걸 ‘도도솔솔’처럼 음계로 표현해서 악보로 만들기도 했다. 스스로 한문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대학 4학년 때 한문 특강을 들으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맹자’를 배웠는데 한 줄도 해석을 못했다.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석사·박사 7년간 한문학을 익혔다. 국문학과에서 한시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은 건 내가 처음이었다.”

 그가 석사 학위를 받던 때의 일화가 있다. 정 교수는 ‘공산목락우소소’(空山木落雨蕭蕭)라는 시 구절을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라고 번역했다. 지도교수는 그의 논문을 던지며 “말이 많다”고 꾸짖었다. “빌 공(空)은 그냥 ‘빈’이라 쓰면 되지, 왜 ‘텅 빈’으로 늘려 썼나. 나뭇잎과 잎은 같은 말이니 ‘잎’이라 써라. 부슬부슬 올라가는 비도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지도교수의 지시대로 다듬어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이라고만 썼다. 처음 쓴 글의 딱 절반만 남았다. 군더더기 없는 정 교수의 문장이 만들어진 계기였다.

-깔끔하고 좋은 문장을 쓰는 작가로도 이름이 높다. 어떻게 써야 하나.

 “오래전 신문에 실렸던 김윤식 교수의 인터뷰 기사 제목이 ‘쓰려면 열 배를 읽는다. 그게 글쓰기 윤리다’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많이 읽고 내면에 많이 쌓아두는 게 먼저다. 그리고 쌓아둔 생각들을 자꾸 체로 쳐서 고갱이만 남겨야 한다. 이게 사유다. 사유가 명료하면 글쓰기는 자연히 해결된다. 흔히 ‘간결하게 써라’ ‘부사를 없애라’ ‘다 드러내지 말고 여운을 남겨라’ 등의 원칙을 말한다. 하지만 그런 건 문장을 다듬는 기술이다. 글은 기술이 아니라 사유가 먼저다. 명료한 사유가 간결한 문장을 만나 날개를 다는 것이다. 문장 다듬을 생각 하기 전에 사유의 벼리를 갈아야 한다. 그 힘은 읽는 데서 나온다.”

-‘인구론’(인문계의 구십 퍼센트가 논다)이나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이다. 인문학은 쓸모있는 학문인가.

 “성현들의 지혜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이를 연구하는 인문학은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삶을 변화시킨다. 예전에 에버랜드 사장이 에버랜드를 세계적인 놀이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디즈니랜드를 벤치마킹하려다 내가 쓴 『비슷한 것은 가짜다』를 읽고 계획을 바꿔 우리식 공원으로 만들게 됐다는 내용의 글을 쓴 걸 봤다. 연암 박지원의 메시지가 오늘을 사는 CEO의 생각을 뒤흔든 거다. 인문학자가 모든 걸 바꿀 순 없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가 담긴 과거의 인물과 사상을 전달하고 소개하는 게 인문학자의 몫이다.”

정민 교수가 추천한 ‘한문학의 매력을 일깨워줄 책’ 4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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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다 1, 2
유만주 지음, 김하라 옮김, 돌베개

18세기 선비 유만주의 일기장이다. 그는 기록벽이 있어서 평소 읽은 책의 목록,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소상히 기록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김치경’이라는 책을 자신이 썼다는 내용도 나온다. 당시는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서적이 전해지면서 지식의 빅뱅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혼란기에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선비의 내면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 방대한 원본을 잘 간추려 편집했다.

자저실기
심노숭 지음, 안대회·김보성 옮김, 휴머니스트

역시 18세기 지식인의 일기장이다. 저자 심노숭은 유배지에서 떠오른 단상을 기록했다. 읽다 보면 다소 따분하기도 하고 편파적인 생각도 눈에 띄지만, 한 사람의 기록이 어떻게 한 시대를 증언하는지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했을 뿐이데, 후대엔 가치 있는 시대의 증언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응답하라 18세기’같은 책이다.

양화소록
강희안, 이종묵 지음, 아카넷

조선 초기, 선비가 꽃을 기르는 것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꽃 하나하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돋보인다. 일기처럼 자유로운 글이 아니라 주제와 갈래를 갖고 쓴 글이다. 선비의 본업은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책은 꽃을 취미로 삼은 사람이 이를 전문적으로 파고들어 쓴 글이라 오늘날 블로거의 글과 비교할 수 있다. 여행이든 요리든 취미를 가꾸는 현대인들이 공감할 만한 글이다.

옛 시정을 더듬어 (상, 하)
손종섭 지음, 김영사

10년 전 이 책을 처음 읽고 아름다운 한시 해설에 놀라 저자를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저자는 당시 80대였다. 그 후 몇 년간 가끔씩 인사드리다가 한양대 대학원 강사로 위촉했다. 그의 강의를 나도 학생들과 함께 들었다. 눈을 감고 비단을 어루만지듯 행복한 표정으로 한시를 읊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통 한학자는 아니지만, 정말 한시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쓴 해설이 감동적이다.

글=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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