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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처럼 산다는 건 잘못된 정보, 강도 만나면 달라는 대로 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지난달 초 40대 한국인 남성 김모씨가 필리핀 중부루손한인회 사무실로 이창호 부회장을 찾아왔다. 아내를 한국에 두고 혼자 이민 왔다는 김씨는 “자금이 2억원가량 있다. 필리핀 여자를 구해 같이 살면서 돈도 좀 벌고 싶다”며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필리핀서 안전하게 살려면
‘묻지마 이민’에 사기·분쟁 휘말려
현지인과 갈등 깊어져 피살되기도

이 부회장은 최근 본지 기자와 만나 “‘필리핀에 가면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를 두고 왕처럼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는 잘못된 통념을 갖고 이민 온 대표적 사례”라며 “그에게 1000만원으로 6개월 신나게 놀다 돌아가라고 충고했다”고 말했다.

고심 끝에 머나먼 필리핀까지 이민 간 로컬 코리아노들이 자주 피살되는 건 왜일까. 전문가들은 “충분한 준비나 대책 없이 강행한 ‘묻지마 이민’이 불행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초기 정착 비용이 싸고 한국에 비해 경제적으로 뒤처져 있다는 인식 때문에 필리핀 이민에 대한 한국인의 ‘심리적 진입장벽’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인터넷 검색 결과와 지인들의 추천만으로 이민을 결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준비가 부실하다 보니 투자사기나 각종 분쟁에 휘말리기 쉽다. 동업자나 현지인과의 사이에 쌓인 갈등이 원한관계로 번지면서 강력범죄의 피해자가 잇따라 나오는 구조라는 것이다.

대다수 필리핀 교민들이 필리핀 내 한인 피해를 막기 위해선 필리핀 이민이 만만하다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중부루손한인회 권영각 감사는 “준비 없이 오면 이것저것 건드려 보다 망하게 되거나 원한을 사게 된다”며 “치안이 안 좋고 총기도 많은 나라라 한국에선 사소한 다툼으로 끝날 수 있는 갈등도 살인과 같은 큰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지인들에게 자신의 정보노출을 최소화하는 것도 범죄 피해를 막기 위해선 필수적 조치다. 자신의 동선이나 금전 관련 정보를 알 가능성이 높은 운전기사나 가사도우미와는 특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종업원으로 일했던 현지인이 원한을 품고 강도로 돌변한 경우도 있어서다. 현지 교민 백모(60)씨는 “이 나라의 주인이 필리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방범 시설이 완비된 안전지역에 집을 얻는 것도 범죄를 피할 수 있는 해법 중 하나다. 지난달 1일 본지 기자가 찾은 앙헬레스 인근의 클락경제특구는 치안상황이 매우 좋았다. 문을 잠그지 않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밤에 여성 혼자 다녀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약 2m 높이의 담장과 철조망으로 외부 지역과 분리된 이곳은 클락개발공사(CDC)에서 고용한 특별경찰 60여 명이 24시간 치안을 관리하고 무등록 차량의 출입을 통제한다. 앙헬레스 코리안데스크 이지훈 경감은 “한인도 여기선 외국인인 만큼 가급적 폐쇄회로TV(CCTV) 등이 갖춰진 안전지역에 사는 게 좋다”며 “우범지역에선 아무리 방범시설을 잘 갖춰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카비테주에서 강도에게 총을 맞아 숨진 이모(54)씨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높은 담장을 쌓아놓고 방범용 개까지 여러 마리 키웠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씨가 살던 곳에선 지난 3년간 한국인 6명이 피살됐다.

만약 우발적으로 강도를 만나면 반항하지 말고 지갑이든, 차든 요구하는 대로 주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앙헬레스 현지 경찰 데드릭 렐라토보는 “필리핀 강도들이 들고 있는 총은 전부 실탄이 든 진짜 총이기 때문에 저항하면 위험하다”고 충고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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