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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 3선개헌 반대, 40대 기수론 이끈 야당 1세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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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호 2 면

한국 야당사의 거목인 이철승(현 헌정회 원로위원회 의장·사진) 전 신민당 대표가 27일 오전 3시 별세했다. 94세. 최근까지도 활발히 대외 활동을 했지만 이달 중순 감기 증세로 입원하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고 한다.


7선 경력의 고인은 한국 학생운동과 야당 정치사의 1세대를 이끌었다. 우익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줄곧 군사정권에 반대한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신민당 시절부터 고인과 야당 생활을 함께한 김상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은 “민주주의와 반공, 의회주의를 위해 평생을 사셨다. 후배들을 특히 사랑했던 형님이셨다”고 회고했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나 전북 전주에서 자란 고인은 고려대 재학 시절인 43년 일제의 학도병 징집령에 반발해 대규모 학병거부운동을 일으켰다. 해방 후엔 인촌 김성수 전 부통령의 영향을 받아 우익 청년단체를 이끌고 반탁운동을 벌였다.


48년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54년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3대 국회의원에 첫 당선됐고, 줄곧 전주에서 4·5·8· 9·10·12대 의원을 지냈다. 55년 민주당이 결성된 후엔 장면 부통령과 함께 민주당 신파의 리더로 활약했다.


60년 3·15 부정선거가 벌어지자 고려대 후배들을 설득해 4·18 의거를 일으켰고, 이것이 4·19 혁명의 직접 도화선이 됐다. 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민주당 정권이 실각한 후엔 한일회담 반대, 3선개헌 반대 투쟁을 이끌며 신민당을 재건했다.


71년 신민당의 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은 고인의 정치역정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당시 49세이던 고인과 김영삼(YS)·김대중(DJ) 의원이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경선에 뛰어들었다. 이후 당수 유진산이 ‘YS 지지를 선언하고 양보하라’고 요구해 고인은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1차 투표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무효표를 던져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후 2차 투표 땐 그에게 당수직을 제안한 DJ의 손을 들어줘 DJ가 YS에게 역전승을 거두게 했다. 고인을 끝으로 71년 ‘40대 기수론자’ 3인이 모두 생을 마감하게 됐다.


76년 신민당 대표에 선출된 뒤엔 ‘베트남 패망의 교훈을 상기하자’며 유신 정권에 협조할 수 있다는 취지의 ‘중도통합론’을 제창했다. 이 주장이 YS의 선명야당론에 대비돼 ‘사쿠라’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80년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정치규제에 묶였으나 85년 신한민주당 바람을 일으키며 7선에 성공했다. 이후 여당인 민정당의 당론인 내각제 지지 발언을 해 야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88년 13대 총선에 낙선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이후 자유총연맹 총재 등 우파 시민사회단체들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고인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어려서부터 축구·야구·농구·역도·기계체조 등에 능했다. 50~70년대 대한역도연맹 회장과 부회장을 줄곧 맡았고, 88 서울올림픽과 2002 월드컵 조직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최근 병세가 악화하자 “시국이 엄중한데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 달라”고 당부하며 조의금과 조화도 일절 받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창희 여사와 아들 이동우 전 호남대 교수, 딸 이양희 유엔 미얀마인권보호관, 사위 김택기 전 의원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실(02-3410-6917), 발인은 다음달 2일, 장지는 서울현충원이다.


이충형·추인영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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