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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가 90번째 도전, 당선되면 빌 클린턴 존칭은 ‘퍼스트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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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호 28면


‘하늘의 반(半)은 여성이다’라는 테제의 정치적인 함의는 무엇일까.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로다”라든가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요약하듯 전근대적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였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타이틀은 현모양처(賢母良妻)였다. 아버지·남편·아들을 순차적으로 따르는 게 여자의 일생이었다.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았더라도 ‘원칙’상으로는.) 중남미 가톨릭 사회의 마리아니스모(Marianismo)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월성을 제한적으로는 인정했다. 도덕성과 영성(靈性)에 국한해서다. 국가 지도자로서는 아니었다.


다 옛날 얘기다. 아직 그런 ‘삐뚤어진’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지만.


세계 민주주의의 원조인 미국이 아직 여성 대통령을 배출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학술적으로도 미스터리 연구주제다. 미국은 전 세계로 남녀평등의 가치를 수출해온 나라다. 어느 정도까지는 미국 영향하에 후진국·중진국·선진국할 것 없이 모두 최고지도자로 여성 총리·대통령을 뽑았다. 물론 그 길이 쉽지는 않았다. 영국 최초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는 1979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2005년 나라를 이끌게 됐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이야기다.

민주·공화 대선 여성 후보는 아직 없어미국에서 남녀불평등이라는 역사적·정치적·관습적 구조를 대통령직이라는 구조의 정점에서 타파하려고 한 도전의 역사는 길다. 가멸찬 도전이었다. 144년 전인 1872년 빅토리아 우드헐이 평등권당 후보로 대권에 도전했다. 우드헐은 여성·흑인의 권리뿐만 아니라 자유연애를 주장했기에 당시 사람들이 보기엔 ‘엽기적’인 후보였다. 우드헐을 필두로 미국 헌정사에서 당의 지명을 받은 여성 후보만 36명, 받지 못한 후보는 53명이 있었다. 다만 이들은 사회주의노동당·사회주의평등당·평화자유당 등 군소정당 소속이었다.


미국의 주요 정당인 민주·공화 양당은 아직까지 단 한 차례도 대선 본선 후보를 여성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한때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확실하다던 힐러리 클린턴 마저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을지조차 거대한 물음표의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런 미국 정치의 ‘보수성’은 세계인을 경악하게 한다. 그나마 민주·공화 양당은 지금까지 각기 딱 한번 부통령 후보를 선출했다. 주인공은 1984년 민주당의 제럴딘 페라로와 2008년 공화당의 세라 페일린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미국 트레이드마크의 핵심은 평등한 기회다. 왜 미국은 대통령 자리만큼은 평등을 실천하지 않는 걸까. 세계경제포럼(WEF)의 따르면 연구 대상 142개국 중 63개국이 여성 최고지도자를 배출했다. 이 잣대로만 보면 미국은 정치 후진국이다.


일단 미합중국 헌법 조차도 여성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사회에서는 각종 문헌의 ‘그(he)를 ‘그/그녀(he/she)’, ‘그들(they)’로 바꾸느라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직 수행과 관련된 대명사가 아직 ‘he’만 있을 뿐이다. 여성 대통령이 나올 경우 미 헌법을 빌미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 승소할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미 헌법이 여성 대통령 탄생에 그리 친화적이 않은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중심제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대처나 메르켈이 나라를 이끌게 된 것은 의원내각제라는 정치구조 덕분일 수 있다. 흥미롭게도 미국처럼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프랑스 또한 아직 여성 대통령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프랑스는 2007년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인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을 역사에 남겼다. 의원내각제에서 유권자가 당(黨)을 본다면 대통령을 뽑는 유권자들은 아무래도 인물을 본다. 인물 따지기에서 성별(性別)이 무의식적으로나마 작용할 수 있다.


역사에 책임을 뒤집어 씌울 수도 있다. 역사는 냉혹하다. 역사는 건너뛰기가 없다. 역사는 단계 밟기를 요구한다. 1920년까지도 미국 여성은 투표권이 없었다. 여성 참정권·노예제도 폐지 운동가인 수전 B. 앤서니(1820~1906)는 1872년 단지 여성 최초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100달러 벌금을 물었다.


확률적인 문제도 있다. 미국 대통령은 갑자기 되는 게 아니다.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미국 대통령이 되려면 부통령, 상·하원의원이나 주지사로 일해야 한다. 미 대통령이 된 부통령은 14명이다. 여성 부통령은 아직 안 명도 없다. 17명은 주지사 출신이다. 현재 여성 주지사는 5명이다. 16명이 상원의원 출신인데 현재까지 여성은 44명, 현재는 20명이 있다. 여성 미 하원의원은 지금까지 300여명, 현재 84명이다. 동네 패싸움에서도 숫자는 중요하다.


구조적인 문제를 떠나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유력 후보 개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기의 미 여성 주지사의 경우 상당수가 남편의 주지사 자리를 승계한 경우다. 비슷한 색안경으로 힐러리를 바라볼 수 있겠다. ‘남편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과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각적인 반격이 가능하다. ‘빌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힐러리’다.


힐러리의 한계는 물론 있을 것이다. ‘왠지 못 믿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이메일 스캔들 등 그와 관련된 수십 년에 걸친 의혹이 있다. ‘민주당 당내 좌파하고는 멀고 월스트리트와는 너무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반(反) 워싱턴 정치 혐오도 힐러리에 대한 의구심을 부추긴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들이 각기 탄탄한 블록을 형성하고 있다. 중간은 엷다.


자리매김(positioning)상의 문제도 있다. 힐러리 클린턴 전 상원의원·국무장관은 상대적으로 온건하다.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변화를 내세우며 한방 먹였다. 이번에도 혁명에 가까운 변혁을 내세우는 버니 샌더스에 고전하고 있다. 상당수 미국 유권자들이 점진적인 개혁보다는 급진적인 변화·혁명에 목말라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민주적인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와 ‘막말 우파’ 도널드 트럼프가 미 대선을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빨갱이면 어때, 막말 좀 하면 어때 미국을 바꾼다잖아’하는 분위기가 좌우 양쪽에서 클린턴을 협공한다. 좋은 점도 있다. 샌더스·트럼프 덕분에 내편·네편 ‘편가르기를 유발하는(polarizing)’ 것으로 보이던 클린턴이 이제는 상대적으로 통합적인 지도자로 보인다.


‘준비된 대통령’(‘여성’이라는 수식어가 굳이 필요 없다)인 힐러리 클린턴은 좀 억울할 것이다. ‘자신의 성공의 희생자(the victim of one’s own success)’라는 표현에 힐러리 클린턴만큼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그는 여성의 이익뿐만 아니라 ‘리버럴(liberal)’ 가치를 위해 평생을 싸웠다. 그래서 그와 함께 싸워온 40~50대 이상 여성 유권자는 그들이 보기엔 ‘철없는’ 20~30대 여성 유권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사실 20~30대 여성 유권자들은 그들의 선배들과는 달리 노골적인 남녀 차별을 경험할 기회가 흔치 않았다. 그들은 ‘정책을 보고 지지해야지 여자라고 지지하란 말이냐’라고 반문한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최고 여성 국무장관(1997~2001년 재임)은 이런 맥락에서 “다른 여성을 돕지 않는 여성들만을 위해 지옥에 특별히 따로 자리가 마련됐다”고 말해 구설수를 자초했다. ‘여성의 적(敵)은 여성이다’라는 말이 꼭 참은 아니더라도 ‘여성은 남성보다 여성을 대할 때 한층 까다롭다’는 말도 이번 미국 대선을 지켜보는 데 필요한 관전 포인트다.

여성의 적은 여성일지도 관전 포인트 한마디로 남녀 간의 갈등이나 페미니즘은 미국 대선의 정치화(politicization)된 핵심 이슈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성 유권자들은 힐러리 클리턴에게 몰표를 던질 것이다. 2008년 버락 오바마에게 몰표를 던진 흑인들과는 달리 2016년의 미 여성 유권자들은 굳이 힐러리를 지지해야할 이유를 절실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 페미니즘 시대 사람들에게 힐러리의 당선은 그들 시대의 화룡점정(?龍點睛)이다. 포스트 페미니즘 세대 혹은 1980~2000년대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에게 이를 납득시키는 것은 힘들다.


힐러리 클린턴에게 미국 대통령이라는 공식 타이틀이 과연 꼭 필요할까. 제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인 애나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에 대해서 ‘사실상 여성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있다. 힐러리 클린턴 또한 남편 빌 클린턴과 더불어 사실상 ‘공동 대통령(Co-President)’였다는 평가가 있다. 힐러리의 도전은 성패를 떠나 미 헌정사에 영원히 기록돼 남을 것이다. 이런 말은 벌써 꺼내기에는 힐러리 클린턴의 가열찬 도전은 생생한 현재진행형이다.


최초이다 보니 최초의 비(非)남자·남성 대통령을 뭐라 불러야 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the first female president)’? ‘최초의 여자 대통령(the first woman president)’? 단어 ‘female’에는 ‘암컷’이라는 생물학적 의미가 담겨 있어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힐러리가 당선된다면, 빌 클린턴은 미국 최초의 ‘퍼스트맨(first man)’이 되는 것인가. (미국 최초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도 최초였기 때문에 최초와 관련된 고민을 많이 했다. 최초에는 고민이 따른다.)


‘최초의 미국 여성 대통령’은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나오고 난 다음에는 ‘해는 동쪽에서 뜬다’처럼 당연시 될 것이다. 언젠가는 ‘이번에는 남성 대통령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하는 주장도 나올 것이다. 여성 미 대통령은 전혀 시기상조가 아니다. 언젠가는 나올 것이며 이미 많이 늦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최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김환영 기자 kim.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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