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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 다시 일어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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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 하는 ‘이달의 책’ 3월의 키워드는 ‘다시 일어서기’입니다. 실패와 절망과 외로움으로 비틀거리는 우리네 삶을 향해 건네는 ‘어깨 두드림’입니다. 볕이 따사로운 봄날의 문턱, 절망을 통해 피어나는 꽃이 얼마나 생기있는지 작품들이 이야기합니다.

나쁜 피, 나쁜 가문은 진정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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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박하
704쪽, 1만8000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Where should I begin).”

 그는 막막하다. 이제 글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살인 이야기다. 살인자는 친형이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아주 유명한 살인자다. 자칫하면 ‘집안에서 일어난 불행을 상품화하는 책을 썼다’는 비난이 날아 올 수도 있다.

 ‘그’는 대중문화 전문잡지인 ‘롤링 스톤’의 수석편집자를 지낸 마이클 길모어다. 형 게리는 두 명의 무고한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고 체포됐다. 잘하면 안 죽거나 최소한 몇 년간 생명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 총살형을 자처하고 저 세상을 향해 떠났다.

 표창원 박사, 가수 이적, 장석주 시인, 소설가 이신조가 강력히 추천하는 책이다. 책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간에 대한, 아니 어쩌면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고백했다. 이 책 『내 심장을 향해 쏴라』의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 식구들은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쳤다. 아버지의 직업은 사기꾼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상하게도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7~8번 결혼했다. 자식은 수십 명일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아버지와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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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길모어는 막내였다. 왼쪽부터 그의 형들인 프랭크 2세와 게리, 그리고 게일렌. [사진 박하]

행복은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이유 없이 어머니와 자식들을 때렸다. 그 중 나는 예외였다. 딱 한번 맞았다. 나쁜 아버지였지만 늦게 얻은 자식이라 그런지 나만은 사랑했다. 그래서 내가 작가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게 됐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형 게리는 정말 운이 없었다. 14살에 고등학교를 중퇴한 형은 지능지수(IQ)가 133이었다. 예술에도 소질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감옥을 들락날락하다가 형이 증오하던 아버지보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수렁에서 거의 다 빠져 나온 적도 있었다. 세상은 녹녹하지 않았다. 가혹했다. 더는 어찌 해볼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었을까.

마치 『이방인』의 주인공처럼 형은 이유 없이 살인했다. 출소한 형을 국가가 철저히 감시했더라면, 아니면 감옥에 계속 가뒀더라면 두 명의 허탈한 희생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국가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었더라면 형은 아마 성공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국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나쁜 피, 나쁜 사람, 나쁜 가문은 있는 것인가. 사형제는 국가에 의한 살인을 정당화하는가.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에는 답이 있는가. 아니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사람은 삶과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이 책은 전미 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았다.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S BOX] 꿈은 성직자, 현실은 살인자

이 책에는 숨겨진 해피엔딩이 있다.

만약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있고, 진정으로 반성하면 구원받을 수 있으며, 구원을 받아도 죗값은 치러야 한다’는 가톨릭이 주장하는 교리가 맞는다면, 살인자 길모어는 연옥에서 출소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됐을 것이다.

1977년 1월 17일 36세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가톨릭 신부를 불러 죄를 고백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인다면 제일 먼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말한 길모어였지만 어렸을 때에는 한때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었다.

어머니가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모르몬교) 신자, 아버지는 가톨릭이었다. 세상과 작별하는 마지막 예식에서 길모어는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길.” 그러자 신부가 답했다. “그리고 주님이 당신의 영혼과 함께 하시길.”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가족 해체된 ‘난민의 시대’…그래도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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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지음, 문학동네
252쪽, 1만3000원

‘은어낚시통신’ ‘천지간’ 등 감각적인 단편들로 1990년대를 호령했던 작가 윤대녕(54)씨의 장편소설이다. 소설집 『도자기 박물관』 이후 3년 만, 장편으로는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이후 무려 11년 만이다.

 그의 소설 세계를 거론할 때 흔히 ‘존재의 시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은어낚시통신’ 말미에 등장해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돼버린 이 표현은 소설에서 밝힌 대로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원래의 장소라는 뜻. 고통스럽고 진부한 이 세계의 반대편, 회귀 본능에 충실한 은어처럼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언젠가 돌아가야 할 싱싱한 세계다.

 『피에로…』는 말하자면 그 시원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제시한 작품이다. 현대를 가족 공동체가 해체된 도시 난민의 시대로 보고 그 대안으로 타인 간의 유대를 바탕으로 한 유사 가족 공동체를 제안한다.

 소설은 윤씨 특유의 ‘스텝’으로 시작한다. 피폐해진 상태의 개인이 있고, 그를 눈여겨보는 외부의 시선이 존재한다. 묘령의 여인과의 인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등 방대한 문화 상징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서른여섯의 극작가 명우는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져 심각한 알콜의존증에 시달리고 있다.

‘마마’로 통하는 부자 할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몬드나무 하우스’라는 이름의 할머니 집에 입주한다. 이곳의 구성원들은 모두 자신 보다 더한 불운에 고통받는 사람들. 서툰 광대처럼 비틀거리거나 넘어져 마음의 문마저 닫아 잠근 사람들이다.

명우는 해결사로 나선다. 그들의 사연을 들어주거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바뀐다. 따뜻한 소설이다. 빨리 읽힌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SNS에선 ‘멋진 남자’로 사는 남편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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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이기호 지음, 마음산책
252쪽, 1만2500원

한 남성이 있다. 정확히 나이는 모른다. 사는 곳은 경기도 남양주, 홀어머니가 경기도 부천에 산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탁기에 넣어놓고 오랫동안 돌리지 않은 빨래처럼 후줄근해진 상태’로 퇴근한 어느 저녁,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 ‘봉순이’를 아버지 산소가 있는 경기도 가평에 묻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늘밤 안에 보내주고 싶구나”라는 단호함과 함께.

이야기는 집에서 차를 끌고 나서는 남성의 짜증부터 출발한다. 한 시간 반 걸려 부천에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두 시간 걸려 가평에 이른다. 17년간 어머니랑 살았던 강아지는 1년 전부터 아팠다. 남성은 땅을 파지만, 삽날은 커다란 돌부리에 툭툭 걸린다. 한기까지 매섭다. 굳이 이래야 하나, 내일 새벽 출근은 어떡하나 심경이 복잡하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담아서 처리하세요’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 순간 어머니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한테 일 년이 강아지한텐 칠 년이라고 하더라. 봉순이는 칠 년도 넘게 아픈 몸으로 내 옆을 지켜준 거야.”

책은 이런 식이다. 제목처럼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은 듯’ 시치미를 뗀다. 어설프게 위로하지도, 이래야 된다며 설교하지도 않는다. 그저 묘사할 뿐이다.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상황이며 극단적이거나 거창하지도 않다. 그런데 막판 뒤통수를 보기 좋게 날린다.

40편의 짧은 글을 모았다. 페이스북·트위터 등 단문 전성시대 아니던가. 최근의 글 소비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저 낄낄거리며 지나칠만한 내용은 결코 아니다. 대학 졸업 후 계속 취업에 낙방한 이가 강원도의 한 밭에서 배추 출하를 하는 사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지 못한 ‘그’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동물원에서 첫 데이트를 하는 풍경, SNS에서 ‘멋진 남자’로 살아가는 남편의 이중생활을 바라보는 아내의 솔직한 심경 등을 찬찬히 그려낸다. 지지리 궁상들의 삶을 비애와 익살로 되살려낸 작가의 솜씨가 만만치 않다. 힐링 또는 독설이 난무하는 세상, 그 어떤 선입견 없이 일상을 관찰하고 이를 날렵한 문체로 묘사한 덕에 책의 흡인력은 높다. 단숨에 책장을 넘기고도 헛헛함보단 묘한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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