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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테러방지법 막겠다더니…은수미 뜬금없이 '세 모녀' 발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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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10시간18분 동안 연설을 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국내 최장 시간 기록을 세웠다. 은 의원이 허리에 손을 얹고 연설하고 있다(오른쪽). 왼쪽은 은 의원이 테러방지법과 관련 없는 발언을 한다며 항의하는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 [사진 김경빈 기자], [뉴시스]

이 법(테러방지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언젠가는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사람이라도 덜 고통 받는 방법을 제발 정부·여당이 찾아 달라.”

 24일 낮 12시48분.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국내 최장시간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 방해) 기록을 세우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은 의원은 이 대목에서 울먹거렸다. 발언을 마친 후엔 부축을 받으며 본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준비 안 된 야당의 필리버스터

이날 새벽 2시30분부터 연설을 시작한 그는 10시간18분 동안 본회의장에서 연설했다.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했던 연설 기록(10시간15분)을 넘어섰다.

23일 첫 주자로 나선 더민주 김광진 의원은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본회의 연설(5시간19분) 기록을 깨고 5시간33분간 연설했다. 이 모든 기록을 다시 은 의원이 깼다. 다음 주자로 나선 정의당 박원석 의원도 9시간을 넘겼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안 직권상정에 맞선 야당의원들은 이틀째 필리버스터를 계속했다. 은 의원은 토론에 앞서 자신의 SNS에 “준비할 시간 없이 필리버스터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내용으로 하면 좋을지 자료 및 의견을 부탁드린다”는 글을 올렸다.

본회의장에선 이를 통해 받은 내용을 죽 읽었다. 다른 의원들도 각종 출력물과 책 등을 들고 연단에 섰다. ‘무제한 토론’을 위해 연단에 섰지만 테러방지법안뿐 아니라 국가대테러활동지침, 국정원법·헌법과 같은 각종 법률, 신문기사 등을 읽었다. 준비 부족 때문이었다.

 은 의원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였던) ‘세 모녀 사건’에서 산재(산업재해)만 적용됐더라도…” “경제적 불평등이나 복지 축소를 의미하는 노동개악(惡)을 긴급하게 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대통령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와 같은 말을 하다 새누리당과 정갑윤 부의장(새누리당)에게 제지당했다. 국회법상 ‘무제한 토론’은 ‘해당 안건에 대해서만’ 발언할 수 있다.

 김 의원이 연설을 마친 뒤 “생리현상보다 발이 아픈 게 가장 힘들더라”고 귀띔하자 다음 주자들은 운동화를 신고 연단에 섰다. 은 의원은 발언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을까 봐 전날 저녁 7시부터 금식으로 필리버스터를 준비했다고 한다.

은 의원 다음으로 발언한 정의당 박 의원의 경우 성인용 기저귀를 준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의원실 관계자는 “준비하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날 오전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원유철 원내대표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달린 문제를 더민주가 선거의 도구로 활용하는 기막힌 상황”이라며 “국가도, 국민도, 안보도 없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정치쇼”라고 비판했다.

 새누리당은 속수무책이었다.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원정수 300석 기준 180석) 찬성해야 중단시킬 수 있는데 새누리당의 현재 의석 수(157석)는 재적의원(293석)의 5분의 3(176석)에 못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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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이후 발언 시간 제한이 생기면서 사라졌던 필리버스터를 부활시킨 국회선진화법도 새누리당에선 다시 도마에 올랐다.

법안 개정을 주도했던 황우여 의원(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은 “필리버스터를 해도 회기(3월 10일까지)가 지나면 무조건 표결하게 돼 있다”며 “정치적 부담(책임)은 선거에서 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는 “필리버스터가 끝나는 순간 바로 ‘날치기(여당 단독처리)’ 할 명분을 주게 된다”며 “국회의장과 각 당 대표가 합의할 때까지 끝장 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는 “테러방지법안을 전부 부인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법안) 수정 협상은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필리버스터는 25일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더민주에선 발언신청자가 쇄도하고 있다.

 준비 안 된 필리버스터로 국회는 이틀째 전면 마비됐다. 타협 없는 한국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면서.

글=박유미·안효성 정치국제부문 기자 yumip@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해당 기사에 걸려 있던 디지털 썰전『테러방지법안 처리를 막기 위한 야당의 ‘필리버스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는 ▶필리버스터 9번째 주자로 나선 강기정…마지막 ‘임을 위한 행진곡’에 걸려 있습니다. 디지털 썰전은 관련 이슈의 최근 기사에 건다는 원칙에 따른 것입니다.  또한 디지털 썰전의 원래 자리인 중앙일보 홈페이지 메인 화면 우측에서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투표는 예정대로 29일까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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