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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e판결] 성폭력으로 인한 출산 경험은 개인의 명예와 관련…혼인 취소 사유 아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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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로 원치 않은 출산을 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결혼했다면, 혼인 취소 사유가 될 수 있을까요.

대법원 판단은 “취소할 수 없다”였습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김모(41)씨가 15살 연하 베트남 부인 A씨를 상대로 낸 혼인 취소 소송에서 김씨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전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2일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민법 제816조가 규정한 혼인 취소 규정은 '사기에 의한 결혼'을 막으려는 것”이라면서 “당사자의 명예나 사생활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할 수 있는 사안까지 혼인 전에 알려야할 의무는 없고, 이로 인해 혼인을 취소할 수도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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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을 제기한 김씨는 2012년 국제결혼 중개업자를 통해 베트남에서 A씨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A씨는 그해 7월 한국에 들어와 김씨의 의붓 아버지이자 시아버지인 최모씨,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A씨는 시아버지 최씨로부터 두 차례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고, 최씨를 고소하고 가출했습니다. 최씨는 2013년 5월 성폭력처벌법상 친족 강간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최근 이 형이 확정됐습니다.

문제는 최씨의 재판 과정에서 A씨가 김씨와 결혼 전 출산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겁니다. A씨는 “만 13살에 베트남 소수민족인 타이족 남성에게 납치 돼 아이를 출산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이에 김씨는 “출산 전력을 속인 채로 결혼했다”면서 A씨를 상대로 혼인을 취소하고 위자료 3000만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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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과정에서 A씨 변호인은 “김씨와 시어머니가 성폭행 피해자인 A씨를 본국으로 내쫓기 위해 오히려 과거 출산 경력을 문제삼고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A씨는 “미성년자 시절 납치 및 강간 피해로 출산과 자유의사에 반한 결혼 생활은 그 사실만으로도 회복하기 어려운 정신적 트라우마”라면서 “끔찍한 과거의 경험을 결혼 상대방에게 고지하도록 하는 의무를 지우는 것은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가하는 것”이라고 호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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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ㆍ2심을 맡은 전주지법은 모두 “납치ㆍ강간으로 인한 원치 않은 출산이었더라도 결혼 상대방에게 고지했어야 한다”며 김씨의 혼인 취소 청구를 받아들였습니다.

1심은 A씨가 김씨에게 위자료 800만원을, 2심은 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습니다. 재판부는 “상대방의 사실혼 및 출산 전력은 김씨가 결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면서 “민법상 ‘사기로 인한 혼인 의사표시’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출산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 곧바로 2차 피해가 생긴다고 보기 어렵고, 결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출산 경력이 차지하는 중대성을 볼 때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은 상대방을 속인 행위였다고 본 겁니다.

여성단체는 즉각 반발했습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급심 판결은 시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에게 13세 때의 성폭력과 출산 경험을 따져 베트남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이라며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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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최종적으로 A씨 주장을 받아 들였습니다. 재판부는 “이 사건처럼 A씨가 성장 과정에서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아동 성폭력 범죄의 피해를 당해 임신하고 출산한 경우 출산의 경력이나 경위는 개인의 명예와 사생활 비밀의 본질적인 부분이 해당한다”면서 “사회 통념상 이런 내용을 혼인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알려야할 의무도 없고, 알리지 않은 것이 '혼인의 신의 성실 의무'를 어겨 비난 받을 정도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혼인을 취소하라고 쉽게 단정한 원심 판단은 잘못”이라고도 했습니다.

기존 판례상 법원은 혼인·출산 전력을 속이고 결혼한 경우 민법상 ‘혼인 취소 사유’로 인정해 왔습니다. 과거 성폭력 피해 경험이 주요 쟁점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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