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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32)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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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호 1 면

신숙주의 영정 이상(理想)을 택한 사육신에 비해 현실을 택한 신숙주의 여유롭고 부귀한 모습이 잘 드러난 영정이다. 그러나 신숙주는 조선시대 내내 사육신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재위 14년 7월 19일. 세조는 고령군(高靈君) 신숙주, 능성군(綾城君) 구치관, 상당군(上黨君) 한명회 등 공신들을 불렀다. 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변 직후 책봉한 정난(靖難)공신, 단종을 쫓아내고 즉위한 직후 책봉한 좌익(佐翼)공신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병석의 세조가 “내 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모든 공신이 반대했다. 공신들이 전위에 반대하자 세조는 대신 대리청정을 시켰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리청정과는 달리 사정전(思政殿) 월랑(月廊:행랑)에서 고령군 신숙주, 영의정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등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제한적 대리청정이었다.


대리청정을 맡게 된 세자는 부왕의 간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국왕의 병을 낫게 하려면 하늘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대사령(大赦令)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병은 차도가 없었고 세조는 8월 1일 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에게 수릉(壽陵)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세자는 납부하지 못한 세금을 탕감하거나 깎아주고 내전(內殿)에 불상을 모셔놓고 기도도 올렸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여서 9월 들자 병세가 악화되는 가운데 황충(蝗蟲)이 추수를 앞둔 들판을 습격하고 혜성까지 나타났다. 드디어 세자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세조가 만든 업보(業報)를 푸는 것이었다. 계유정변과 상왕 복위 기도 사건(사육신 사건) 때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석방하는 문제였다.


16년 전인 단종 1년(1453)의 계유정변 때는 황보인?김종서 등의 가족들을 공신들이 나누어 가졌고, 13년 전인 세조 2년(1456)의 사육신 사건 때는 성삼문?유응부 등의 가족들을 나누어 가졌다. 남편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 집의 여종이 되고 성 노리개가 된 이들의 원한을 풀지 않고서는 대사령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자는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정인지?정창손?신숙주?한명회?홍윤성?김질 등의 공신들은 계유정변 관련자 친족들의 방면(放免)은 찬성했으나 사육신 사건 관련자 친족들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세자는 “공노비가 된 자는 석방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공신에게 나누어준 자도 방면한다면 대신들이 싫어할까 염려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다.(『세조실록』 14년 9월 3일)”라고 덧붙였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는 괜찮지만 공신들의 재산으로 전락한 사육신의 친족들을 석방하려고 하면 공신들이 싫어할 것이란 뜻이었다. 그러자 사위 김질에게 사육신 사건을 고변시켰던 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이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방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세자는 계유정변과 사육신 사건 피해자의 친족 일부를 석방했는데 그 수가 200여 명에 달했다.

①김홍도의 밭갈이 백성들은 1년 내내 힘겹게 농사를 지어도 공신들의 대납권 때문에 몇 배의 세금을 더 내고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②정인지의 詩句 정인지는 공신이자 왕가의 사돈(아들 현조가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으로서 그 위세가 국왕을 웃돌았다. 사진가 권태균

수양대군과 함께 쿠데타로 집권한 공신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특권을 보장하는 각종의 정치?경제?사회적 제도를 갖고 있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관직을 매매하는 분경(奔競)과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면죄(免罪) 특권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공신전(功臣田)과 세금 납부 대행권인 대납권(代納權)이 있었다. 예종은 공신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이런 제도적 장치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종은 즉위 초 이런 특권에 손을 댔다. 즉위 직후 종친?공신들의 분경을 금지시키고, 위반하면 온 집안을 족주(族誅)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귀성군 이준과 김질의 항의를 받고 본인만 극형(極刑)시키는 것으로 물러섰으나 이후에도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는 사헌부의 서리(胥吏)와 조례(관청 소속의 하인)들을 보내고, 무신들의 집에는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드나드는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사헌부 관리들은 예종보다 공신들이 더 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몸을 사렸다. 반면 무인들은 우직하게 국왕의 명령을 수행했다. 예종 즉위년(1468) 10월 19일 공신들의 집에 드나드는 분경자들을 대거 체포한 것은 무인인 선전관들이었다.


예종은 문신들의 집에 분경하는 것도 선전관이 체포한 것을 지적하면서 “분경을 금하지 못한 것은 사헌부의 책임”이라면서 사헌부 지평(持平) 최경지(崔敬止)를 의금부에 하옥했다. 예종은 특히 함길도 관찰사가 신숙주에게 뇌물을 보낸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공신을 직접 벌하지는 않았지만 국왕이 천인까지 직접 국문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분경하기는 어려웠다.


?? 예종은 공신들의 대납권에도 손을 댔다. 세금을 선납(先納)한 후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것이 대납인데, 적은 경우가 배징(倍徵), 곧 두 배였고 보통이 서너 배였다. 개인의 세금을 대납하는 것이 아니라 군현 단위로 대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액수가 막대했다. 예종은 즉위년 10월 16일, “대납은 백성들에게 심하게 해로우니, 이제부터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친?재추를 물론하고 곧 극형(極刑)에 처하고, 가산은 관에 몰수한다. 공사(公私) 모두 대납을 금한다”라고 선언했다. 『예종실록』은 “대납(代納)하여 쌀로 바꾸는 것은 모두 거실(巨室)에서 하는 짓이었으므로, 능히 혁파할 수가 없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세조가 공신과 종친들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보장함으로써 자신을 지지하게 한 제도였다. 대납의 폐해는 막대했다. 몇 배의 세금을 내야 하는 백성들에게는 악정 중의 악정이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대납이 없어지지 않자 예종은 방을 붙여서 대납 금지의 뜻을 널리 알렸다. 대납 금지에 대한 예종의 뜻은 확고했다. 그러나 공신들의 반발도 거셌다. 이들은 선납했으나 아직 받지 못한 대금이 있다고 주장했다. 호조에서는 이들의 압력에 굴복해 예종 1년 1월 27일 ‘이미 대납하고도 값을 다 거두지 못한 자는 기한을 정해 거두도록 하자’고 요청했다. 예종은 윤2월 그믐까지 한시적으로 받으라고 허용했다. 대납을 매년 저절로 막대한 이득이 보장되는 가업처럼 여기던 종친?공신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런 상황에서 예종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재위 1년 4월에는, “금후로는 무릇 군무(軍務)를 잘못 조치한 데에 관련된 자는 공신이나 의친(議親: 임금의 친척)을 물론하고 죄를 주게 하라”고 명하고,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이 되게 한 자는 종친?재신?공신이라도 본율(本律)에 의거하여 처벌하라고 명했다. 공신들의 면죄권에도 손을 댄 것이다. 양민을 천민으로 만든 자는 교형(絞刑: 교수형)이었다. 재위 1년 5월에도 앞으로 민생에 해를 미치는 자는 공신?의친?당상관을 논할 것 없이 모두 직단(直斷)하여 가두고 국문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분경은 근절되지 않았다. 예종과 공신 세력은 충돌로 치닫고 있었다.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구공신의 견제 세력을 스스로 무너뜨린 예종으로서는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34호 2009년 10월 4일, 제132호 2009년 9월 20일


http://sunday.joins.com/archives/42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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