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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대디의 명절치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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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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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키즈팀장

우리 회사엔 워킹대디가 있다. 매일 집에서 직장으로 출근하고, 직장에서 집으로 다시 출근하는 여느 워킹맘 못잖게 빡빡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아내는 주말 근무와 야근이 잦다. 당연히 그의 ‘독박 육아’(육아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는 것) 빈도는 높다. 그는 휴일에 회사 갈 일이 생기면 환호한다. 친가나 외가에 떳떳하게 아이들을 맡길 수 있어서다.

그렇다고 “아내가 할 일을 왜 내가”라고 한탄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아는 당연히 엄마 몫이고, 아빠 참여는 예외적이라 여기는 풍토에 상처받곤 한다. 어린이집에서 ‘엄마 참여 수업’이라고 보낸 무심한 공지를 받곤 “혹시 아빠는 참여하면 안 되나요?”라고 확인해야 하는 고충을 누가 헤아려줄까.

또 배고프다 우는 아이 안고 달려간 수유실에 ‘아빠 출입 금지’ 팻말이 붙은 걸 보곤 좌절한다. ‘모유수유실’과 ‘수유실’을 구분해 일반 수유실에선 아빠들도 젖병으로 분유를 먹일 수 있게 하는 섬세한 배려가 아쉽다는 것이다.

그런 그도 명절만 되면 부엌 근처엔 얼씬거리지 않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고리타분한 남자가 된다. 아내는 ‘착한 며느리’로 변신해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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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그는 “요즘 세상에 여자만 집안일을 하는 가정이 어디 있겠나. 그래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본가에선 일종의 역할놀이를 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는다.

명절치레 때문에 아내와 다투지는 않는다. ‘명절 코스프레’가 끝나자마자 아내는 직장으로 달려가고, 그의 독박 육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명절증후군 따위는 느낄 겨를도 없이 부부 모두 바쁜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긴다.

어느 온라인 맘 커뮤니티에선 “명절 시작이네요. 달력에서 빨간 글씨만 봐도 토할 것 같아요”라는 글에 공감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하루 세끼 30인분의 밥과 설거지를 해내는 부엌데기 막내 며느리로 변신해야 하는, 학계에서 존경받는 교수님부터 종교 ‘덕분에’ 부담이 적은 이들까지 명절 풍경은 집집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연로한 부모님의 정신건강을 위해 일정 정도는 역할놀이를 하게 마련이다.

부엌에서 나올 틈 없는 ‘착한 며느리’, 해다 바치는 음식이나 먹으며 리모컨이나 만지작거리는 ‘돈 버느라 고생한 귀한 아들’ 역할 시간이 길고 그 강도가 높을수록 명절증후군이 심할 것은 자명하다. 아들과 며느리가 집으로 돌아가면 눈앞에서 보이던 것과 꼭 반대로 역할을 바꾸게 되리라는 공공연한 비밀을 이 지면을 통해 폭로한다.

이경희 키즈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