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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에 덮혀버린 삼례 나라수퍼 사건의 진실,대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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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검찰 등 공권력은 무고한 시민들을 살인자로 만들었다. 이들은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는 제보를 무시했고, “우리가 범인”이라는 진범들의 고백도 묵살했다. 하지만 최근 진범이 억울한 옥살이를 당한 피해자들 찾아가 “제가 살인자입니다”라고 고백·사죄하면서 17년 만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서 발생한 ‘나라수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이다.

지난달 29일 이모(48·경남)씨는 그동안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해온 임모(37)씨 등 '삼례 3인조'를 찾아가 “저를 포함한 ‘부산 3인조’가 삼례 나라수퍼 사건의 진짜 범인”이라고 자백했다. 이씨는 “친구 조모(49)·배모(48·지난해 사망)씨와 함께 익산에 가서 놀던 중 돈이 떨어져 인근 삼례의 수퍼를 침입해 강도 짓을 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범인으로 몰려 옥살이를 한 최모씨 등 3명을 만나 무릎 끓고 사죄했다. 이 사건은 공소 시효는 2009년(10년)에 만료돼 법적 책임을 물을 근거는 사라졌다.

사건은 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을 앞둔 그 해 2월 6일 오전 4시쯤 삼례읍 나라수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했다. 이들은 수퍼를 운영하는 유모씨 부부의 입과 눈을 청색 테이프로 봉하고 금반지·목걸이 등 200만원 어치를 훔쳤다. 또 안 방으로 건너가 집주인 유모(당시 77)할머니의 손과 발을 묶고 입·코에 테이프를 붙인 뒤 책상 서랍에서 25만원을 꺼내 달아났다. 유 할머니는 기도가 막혀 30분 뒤 질식사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8일 만에 임모(당시 20)·최모(19세)·강모(19)씨 등 ‘삼례 3인조’를 붙잡아 강도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동네 선후배 사이로 가정 환경이 불우해 중학교만 졸업한 뒤 동네에 남아 있던 청년들이었다. 수퍼 주인은 당시“범인은 경상도 말투를 쓰는 20대”라고 진술했지만, 이들은 삼례 인근을 벗어난 본 적이 없는 현지 토박이였다.

그런데도 경찰은 “비슷한 범행 전과가 있는 주변의 불량 20대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 3명이 범행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1~3심 재판을 거쳐 4~6년씩 옥살이를 했다. 물증 없이 강압과 자백에 의존한 경찰의 헛발질에 의해 멀쩡한 청년들은 살인범으로 전락하고 형무소 쇠창살에 갇혀 젊음을 허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검찰과 경찰이 진범을 확인하고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발생 두 달 뒤인 99년 4월 완주경찰서에 “삼례 나라수퍼 강도 사건의 진범을 안다”는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부산 3인조와 알고 지내던 한 친구가 “이씨 등 3명이 나라수퍼에서 할머니를 살해했고 반지·목걸이 등을 금은방에 팔았다”고 제보했다. 하지만 경찰은 현상금(300만원)을 노린 정신이상자의 제보라며 무시했다.

검찰도 진실을 덮었다. 99년 11월 부산지검은 “삼례 나라수퍼 강도 사건이 범인이 따로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에 착수했다. 부산 3인조가 필로폰 투약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나온 정보였다. 부산 지검은 이들의 범행을 자백받고, 장물업자의 거래 장부에서 강탈 품목도 확인했다. 사건은 2개월 뒤 전주지검으로 이송됐다.

하지만 초기 사건을 담당했던 전주지검 최모 검사는 ‘혐의 없음’으로 종결했다. 전주지검은 당시 “부산 3인조의 진술이 오락가락하고 엇갈린다”고 결론냈다.

이 사건은 발생 8개월만인 99년 10월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면서 진실이 영원히 묻히는 듯했다.

이에 따라 최씨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00년 6월 전주지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2년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지난해 3월 다시 재심을 청구해 전주지법이 오는 3~5월 재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살인자의 누명을 쓴 삼례 3인조의 삶은 망가졌다. 최씨는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살인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청춘이 썪였다. 경찰에서 구타와 협박을 당해 거짓 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이씨가 스스로 찾아와 진실을 밝혀주니 울분이 풀리지만, 무고한 시민을 살인자로 몰았던 공권력의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 3인조 중 범인이라고 자백한 이씨는 “경찰·검찰에 ‘우리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는데도 들어 주지 않았고, 오히려 ‘다 끝난 사건인데 뭘 그러냐’ ‘더 이상 떠들지 말고 조용하게 살라’는 으름장을 들었다”고 말했다. '부산 3인조' 중 조모씨는 현재 익산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 배모씨는 지난해 사망했다.

전주·부산=장대석·차상은 기자 dsj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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