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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작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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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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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날 사랑하긴 하는 거야?” 여자가 묻는다. 이 대목에서 즉각 “그럼, 당연하지”라고 말하는 남자 드물다. 닭살 돋아서 못하는 이가 많다. 더 난감한 질문을 부르는 멍청한 대답임을 직관적으로 또는 경험에 의해 알기에 회피하는 경우도 많다. 후속 질문은 예컨대 “근데 나한테 이래?” 이런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 “너 나 못 믿느냐?”고 역공을 펼친다. 약간 화를 내는 것도 효과적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개 그랬다.

그런데 이렇게 받아치는 게 안 먹히면 증명 작업 단계를 피하기 힘들다. 강아지가 두 눈으로 하트 뿅뿅 날리는 이모티콘 정도로는 해결이 안 된다. 명품 가방이든, 고가의 액세서리든 뭔가 ‘정성’이 필요하다. 이심전심? 세상이 그렇지가 않다. ‘응팔’의 덕선이도 그랬다. 정환이는 끝내 말하지 않았고, 덕선은 말과 몸으로 애정을 표현한 택이를 택했다. 만원 버스에서 팔뚝에 핏줄 세워가며 승객들 밀침을 막아주고 비 오는 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우산을 건네도 덕선이는 정환이의 마음을 몰랐다. ‘어남류’와 ‘어남택’의 운명은 그렇게 갈렸다.

연인에게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사랑하는 마음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이 왔다. 공무원이 되려거나 이미 공무원이 된 자가 승진하려면 애국의 정도를 보여줘야 한다. 지난달 26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의 공직가치 조항에 ‘애국심’이 새로 포함됐다. 민주성과 공익성은 삭제됐다. 대통령 뜻이 반영된 결과라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국민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할 때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고 또 공직에 있는 우리는 더욱 그래야 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문제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기도, 확인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묵묵히 제 일 열심히 하는 공무원은 정환이처럼 냉가슴만 앓을 수 있다. 부당한 지시에 대들면 애국심 없는 이로 낙인찍히기 십상이기도 하다.

과학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뇌파 감지기를 머리에 붙이고 애국가를 들려주거나 한·일전 축구 경기를 보여주며 두뇌 활성화 정도를 측정하면 된다. 애국심 미달이 사유가 돼 승진에서 탈락한 이들이 이런 검사를 해 보자고 요구하는 날이 진짜로 올지도 모른다.

가수 신승훈은 “보이지 않게 사랑할 거야”라고 노래 불렀다. 칼릴 지브란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이라고 시를 썼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