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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원샷법·인권법 합의 하루 만에 뒤집은 더민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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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더불어민주당이 새누리당과 모처럼 약속했던 합의를 뒤집고 기업활력제고특별법(원샷법)과 북한인권법을 무산시켰다. 원샷법과 인권법은 지난달 23일 여야 원내대표가 엿새 뒤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한 법들이다. 그러나 더민주는 본회의 개최 직전 자구 하나를 문제 삼아 북한인권법을 불발시킨 데 이어 의원총회를 열고 원샷법마저 뒤집었다. 더민주에 정부·여당과 국정의 동반자 역할을 할 제1야당의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합의를 손바닥 뒤집듯 쉽게 어기며 국민을 우롱해도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야당이라면 국회의장이 두 법을 직권상정하더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김종인 체제’ 첫 작품이 약속 파기
강경파 손들어줘 ‘도로 민주당’ 자초
여당도 협상 끈 놓지 않는 노력 필요

더민주가 원샷법 처리를 불발시킨 이유는 “삼성 등 대기업에만 좋은 법”이란 것이다. 그러나 원샷법은 주력 업종에서 공급과잉 위기를 맞은 기업들의 사업 재편 절차를 간소화해주는 내용이다. 또 대기업이 악용할 수 있는 독소조항은 여야 협상 과정에서 상당 부분 삭제됐다.

더민주가 북한인권법을 뒤집은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법은 2005년 처음 발의된 이래 여야가 11년 동안이나 협상을 거듭한 끝에 합의를 이룬 법이다. 최근엔 더민주 내에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는 의원들이 늘어나 문재인 전 대표가 “(처리를) 검토하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갑자기 “‘함께’란 단어의 위치가 잘못돼 당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이유를 들고 나와 결렬시켰으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북한인권법을 막무가내로 반대해온 외부 세력의 압박을 의식한 건 아닌지 묻고 싶다.

더 큰 문제는 합의 파기 시점이다. 더민주가 새출발을 다짐하며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를 출범시킨 지 사흘 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당초 여야 원내지도부가 두 법의 처리에 합의한 직후엔 더민주 내에서 별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 전 대표가 물러나고 당의 전권이 김 위원장에게 옮겨간 뒤부터 친노 계열 등 강경파 의원들이 두 법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끝에 합의가 뒤집어진 것이다. 여권 출신인 김 위원장에 대해 강경파들이 ‘길들이기’ 차원에서 두 법의 파기를 끌어낸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올 만하다.

경제수석을 지내 나라 경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김 위원장도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이승만·박정희 묘소를 참배하고 ‘운동권 정치, 친노 패권주의’와 결별을 외친 사람이 “이 법 하나로 경제가 살아나겠나”면서 운동권 출신 강경파들의 법안 발목잡기에 동조했다. 김 위원장이 앞으로도 이렇게 ‘도로 민주당’ 식으로 가서는 아무리 인재영입 바람을 일으켜봤자 총선은 물론 수권(受權)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민주의 합의 파기로 노동개혁 4법과 서비스발전기본법 처리는 더욱 험난해졌다. 하지만 이럴수록 새누리당은 더민주와 대화하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여 2월 국회에선 이 법들이 반드시 통과되도록 해야 한다. 협상을 포기하고 직권상정 같은 우회로에만 매달리면 더민주 강경파들의 막무가내식 반대에 빌미를 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