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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인사이드] 달리던 차에 불…법원 "제조사가 100% 책임" 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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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던 차의 엔진에 불이 붙었다면 누구 책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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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밤 10시쯤 쌍용차 렉스턴을 몰고 경북 청도에서 대구를 향해 달리던 A씨는 옆 차가 울린 경음기 소리에 놀라 차를 세웠습니다.

내려 확인해 보니 엔진 아래쪽에서 불똥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갓길에 차를 세운 후 불을 꺼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고 결국 소방대원들이 출동해 불을 껐습니다.

A씨는 다행히 아무데도 다치지 않았지만 사건 1년여 전에 구입해 이제 8000㎞를 갓 넘게 달린 A씨의 차는 엔진 등이 크게 손상됐습니다. A씨가 가입한 B보험사는 자차 손해보험금 2594만원을 지급한 뒤 쌍용차를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9부(부장 오성우)는 보험사에 완승을 안겼습니다. 재판부는 "쌍용차는 B보험사에게 2234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31일 알려왔습니다.

재판의 쟁점이 된 것은 하자가 누구의 과실로 발생한 것인지를 누가 입증할 것이냐였습니다.

현행 제조물책임법(PL)은 제품의 결함으로 인해 각종 손해가 발생하면, 제조업자가 제조물을 자신 공급한 게 아니라거나 ▶제조물 공급 당시 과학ㆍ기술 수준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결함이었다거나 ▶제조당시의 법령상 기준을 준수했다는 점 등의 면책사유를 입증 못하면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조사가 “잘못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하면 불법행위를 한 것으로 추정해 손해를 배상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법은 제조물의 하자로 인한 2차 피해, 즉 소비자의 생명ㆍ신체나 그 물건이 아닌 다른 재산에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맹점이 있습니다.

자동차의 하자로 자동차값만큼 손해를 본 A씨는 이 법의 직접적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을 잘 아는 보험사도 PL법이 아닌 민법상 매도인(판매자)의 하자담보책임 규정을 이용했습니다. 민법상 하자담보책임에서 소비자는 하자가 판매할 때부터 있었던 것이고 그점이 손해발생의 원인이 됐다는 점 등을 모두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 점을 믿어서인지 쌍용차는 “차주의 과실로 인정할 만한 문제점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으면서도 재판과정에서 “이 사건에 앞선 두 차례의 사고와 화재가 무관하다고 할 수 없고, 주행거리 8000㎞가 넘는 상태에서 화재가 난 것은 운전자의 관리부실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재판과정에선 “배터리 플러스 단자 부분에서 발생한 전기적 스파크가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전문가 진단 외에는 추가로 사고 원인이 드러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PL법의 논리를 하자담보책임의 해석에 끌어다 쓸 수 없을지 고심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도 소비자 편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하자담보책임에는 제조물책임의 증명책임 완화의 법리가 유추적용된다고 할 수 없다”고 보고 있지요. 판매자와 제조자가 다른 경우도 많은 데 제조물책임의 법리를 일반화하면 자칫 판매자가 과도한 책임을 지게될 수도 있고, 남소의 우려도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 듯 합니다.

재판부는 대법원이 남겨 둔 ‘특별한 사정’이 바로 이 사건에 적용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매도인과 제조자의 관계가 밀접해 둘 사이에 정보가 쉽게 공유되고, 매도인도 전문적 하자 보수 능력을 갖는 등 매도인과 제조사를 동일시할 수 있는 경우라면 매도인의 하자담보책임도 제조물 책임의 법리에 따라야 한다"고 제시했습니다.

결국, 재판부는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자동차의 결함이 아닌 다른 원인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제품의 결함으로 제품이 손상되면 소비자는 분하지만 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동차처럼 가격이 높은 물건의 경우 소비자의 마음은 더 분하지만, 매우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그 생산과정을 소비자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급발진으로 인한 차량 파손 등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법원이 자동차회사의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결국 증명책임이 소비자에게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번 판결의 취지가 다른 재판에도 영향을 준다면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겠지요. 대법원도 이 판결을 유지해 줄 지 두고 볼 일입니다.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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