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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제제의 행복찾기 … 치유 에너지 가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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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14면


심리학의 가장 큰 적은 회의주의다. 이렇게 치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말 심각한 환자에게 이런 요법이 통할까, 이렇게 열심히 상담해봤자, 이렇게 열심히 들어주어봤자 효과가 있을까 하는 의심과 회의가 상담사나 의사들은 물론 환자 스스로를 괴롭힌다. 마음 속 은밀한 사생활은 MRI스캐닝 같은 첨단 과학기술로도 알아낼 수 없기에, 몸에 난 상처처럼 눈에 띄는 치유를 확인할 수 없기에, 심리치유는 늘 어려운 과제다.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가장 희망적인 일은 주변에서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실제로 심리치료를 통해 치유되고 있다는 확신을 줄 때다.


내 여동생이 바로 그런 사례였다. 그녀는 심각한 육아스트레스와 출산 후 경력 단절로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우리 가족 모두 동생을 걱정하고 도와주려 했지만, 어떤 위로도 그 아픔이 치유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당시 일곱 살이었던 조카가 엄마를 또 어찌나 괴롭히는지, 그 어린 것이 엄마에게 상처 주는 방법을 매일 연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자신보다 아이를 더 걱정했던 동생은 아들을 위한 미술치료를 시작했다.


상처 줬다는 것 받아들이는 게 치유의 시작그런데 1년 넘게 미술치료를 하면서 동생은 아이와 함께 자신도 변화하는 것을 느꼈고, 미술치료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미술심리치료사 1급 자격증까지 따게 되었으며, 지금은 방과 후 교사로 일하면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있다. 이 모든 극적인 변화가 단 1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곱 살 아들의 분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함으로써 이제는 자신의 상처와 용감하게 대면하게 된 동생은 요새 늦깎이 공부에 신이 났고, 그녀가 행복해지자 온 집안이 화목해졌다. 동생이 대학원에 가고 싶어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가지 못했던 오래전의 상처를 이제야 한풀이할 수 있게 되니, 제부는 물론 온 가족이 그녀의 공부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것이야말로 성공적인 가족치료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가족관계에서의 트라우마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가족은 겉으로는 공격적이지만 속마음은 착해, 엄마아빠가 미웠지만 모두 날 위해서 그런 거였어…. 이런 식으로 문제를 회피할 것이 아니라, 가족이 서로에게 분명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치유의 시작이다.

영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2012)’의 한 장면

데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아이에게 상처 주는 가족의 전형이다. 아버지는 아이를 차근차근 훈육하기보다는 조금만 화가 나도 무조건 때린다. 어머니는 돈을 버느라 항상 피곤에 절어 있어 집에 들어오면 말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다. 주인공 제제가 불행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가는 과정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치유의 스토리다.


어른들은 자신들도 한때는 그렇게 장난꾸러기였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고 어린 제제를 무조건 벌주고 때리고 욕한다. 제제가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는 장면은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허리띠가 끔찍한 힘으로 내 몸을 휘감았다. 허리띠는 마치 천 개의 손가락이 달린 것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찾아 때리고 있었다. 나는 벽 한 모퉁이에 고꾸라졌다. 아빠가 나를 정말 죽일 것만 같았다.”


허공에 매달린 빨랫줄을 홀랑 끊어 그 많은 빨래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 너무도 외롭고 쓸쓸해 곁에 있는 라임오렌지나무와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 자신을 아껴 주는 선생님의 꽃병에 꽃이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남의 집 정원에서 몰래 꽃을 꺾어다 놓는 마음. 이 솔깃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 버리는 과감함 때문에 제제는 늘 말썽꾸러기나 괴짜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야단맞을 행동’의 뒷면에는 지긋지긋한 가난과 아버지의 매질 속에서도 끊임없이 ‘놀이의 행복’을 찾고, 자신의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찾으며,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걱정하는 따스한 마음이 숨 쉬고 있다.


게다가 제제에게는 못 말리는 입심까지 있다. 남의 집 꽃을 꺾는 것은 도둑질이라고 혼내는 선생님께 제제는 이렇게 항변한다. “세실리아 선생님. 이 세상은 하나님 것이 아닌가요? 이 세상 모두 하나님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꽃도 하나님 것이에요.”


제제는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불쌍하다는 이유로, 도로띨리아를 형제자매처럼 애틋하게 걱정한다. “다른 아이들은 그 애가 깜둥이에다 가난뱅이라면서 같이 놀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앤 매일 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기만 해요. 저는 선생님께서 주신 돈으로 산 생과자도 그 애하고 나눠 먹어요.”


뽀루뚜까는 그렇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제제를 폭력과 윽박지름이 아닌 사랑과 이해로 보살펴 준 첫 번째 타인이다. 그는 제제와 모든 것이 반대다. 부자이며, 나이 많은 어른이고,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자랑하거나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뽀르뚜까는 어른이지만 아이처럼 순수하고 천진하며, 제제는 아이지만 어른처럼 속 깊고 이해심이 많다. 이 ‘어른아이’와 ‘애어른’이 만나 이루는 눈물겨운 우정의 하모니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제제의 인생에 따스한 등불이 되어 준다.


사랑과 이해로 제제 보듬은 ‘어른아이’무정한 시간이 흘러 이제 아저씨를 더는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제제는 자신의 슬픈 어린 시절 마지막 버팀목이 되어 주던 크고 깊은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제제가 마흔여덟 살이 되어 뽀르뚜까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제 그 철없는 장난꾸러기 제제가 ‘또 한 사람의 뽀르뚜까’가 되어 이 세상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싶어 함을 알 수 있다. “나의 사랑하는 뽀르뚜까, 제게 인생의 따뜻함을 가르쳐 주신 분은 당신이었습니다. 이젠 제가 누군가에게 놀이구슬과 포스터를 나눠주려 하고 있습니다. 따스함이 없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제는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은 적 없이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여섯 살 때부터 일만 해 온 엄마를 가엾게 여겨 어른이 되어 시인이 되면 꼭 자신의 시를 읽어드리겠다고 다짐한다. “엄마는 저한테 잘해 주는 편이에요. 때리실 때도 뒤뜰에 있는 가느다란 접시꽃 나뭇가지로 종아리만 때려요.” 제제는 자신도 가난하고 힘들면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을 걱정한다. “그 애 엄마는 남의 집 빨래를 하세요. 애들이 열한 명이나 된대요. 게다가 모두 아직 어리고요.” “엄마가 작은 것이라도 더 가난한 사람과 나눠야 한다고 하셔서 그 애와 제 크림빵을 나눠 먹은 거예요.”


좋은 문학 작품은 고통받는 개인의 아픔을 치유한다. 위대한 문학 작품은 고통 받는 개인을 넘어, 신음하고 있는 사회 자체에 커다란 화두를 던지고, 마침내 집단적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는 그런 집단적 치유의 에너지가 있다. 이 작품이 감동적인 이유는 그토록 말썽꾸러기였던 제제가, 때로는 정말 심각한 문제아나 악동으로 보였던 제제가 뽀르뚜까와의 만남을 통해 ‘분명 변화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우리에게 희망을 줄 때는 결국 인간이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과 인격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임을 증명할 때가 아닐까. 그리하여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은 ‘이미 그러함’이 아니라 ‘항상 조금씩 되어 감’에 있으니. 죽을 때까지 한 발 한 발 ‘더 나은 인간’을 향해 변해가는 우리 자신의 ‘열린 마음’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심리학의 보물이다.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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