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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세상과 만날 때라는 생각에 우리 얘기 다룬 영화에 출연했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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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16면

2016 선댄스 영화제를 찾은 요시키. 사진 AP

전성기 시절의 ‘엑스 재팬’.

엑스 재팬. 일본 록음악계에서 ‘전설’로 추앙받는 그룹이다. 소위 ‘비주얼 록’이라 불리는 장르를 태동시켜 이후 수많은 후배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줬던 팀으로도 유명하다. 지금까지 팔아치운 앨범만도 3000만 장. 5만5000석에 달하는 도쿄돔에서만 18번의 콘서트를 모두 매진시켰다. 1990년대 말 일본 음악 수입 금지 조치가 풀리기까지, 한국에서 암시장을 통해 판매된 해적판이 100만 장에 달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룹 엑스 재팬의 ‘빛’의 역사다.


하지만 그룹의 리더인 요시키(林佳樹·51)의 삶은 ‘어둠’에 가까웠다. 갓난아기 때부터 몸이 약했다. 의사는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 했다. 병치레가 잦았고, 1년에 3분의 1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10살 때 아버지가 자살했다. 눈 앞에서 새파랗게 변해버린 아버지의 시신을 목격했다. 함께 엑스 재팬 활동을 하며 가족처럼 지냈던 멤버 중 두 명, 히데와 타이지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모두 자살이었다. 4살 때부터 친구였던 멤버 토시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 빠져 팀을 버렸다. 엑스 재팬은 해체됐고, 요시키는 절망했다. 광속으로 연주하는 드럼과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 손에서 떼질 않는 피아노 때문에,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팀이 재결성해 활동을 재개한 지 10여 년이 돼 가지만, 여전히 고통은 단 한 순간도 그의 삶에서 떠나질 않았다.

영화 ‘We are X’의 한 장면, Passion Pictures 제공

요시키는 이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 번도 대중에게 직접 털어놓은 적이 없다. 팬들에게 그는 늘 비밀스럽고, 알 수 없는 존재였다. 21일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개막, 열흘간 계속된 2016 선댄스 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위 아 엑스(We Are X)’가 뜨거운 화제를 모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이번 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된 ‘위 아 엑스’는 2014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던 콘서트를 중심으로 엑스 재팬의 흥망성쇠와 새로운 도전의 과정을 담아냈다. 요시키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개인사를 담담히 풀어놓았다. 미국 시장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엑스 재팬과 요시키의 삶의 굴곡에, 많은 영화계 관계자와 관객들이 충격과 감동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2016 선댄스 영화제 행사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요시키 ⓒErik Philbrook

요시키는 이번 영화를 통해 세상과의 새로운 접점을 찾으려는 듯, 직접 영화제에 참석해 현장 곳곳을 누볐다. 100여 명의 소규모 청중 앞에서 스스럼없이 피아노를 연주하는가 하면, 라운지나 클럽 등에 나타나 파티를 즐기기도 하는 등 파격적 행보도 보였다. 가수 조쉬 그로반, 백스트리트 보이즈 출신 AJ 맥린, 석유재벌 집안 출신 배우로 유명한 발타자 게티 등은 행사 기간 내내 요시키의 열혈 팬을 자처하며 그가 가는 곳마다 쫓아와 응원을 보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수줍음 많기로 유명한 요시키지만, 이번 영화제에서만큼은 적극적으로 이들과 어울리고 기념촬영을 하는 등 한결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 팬들의 놀라움을 샀다. 중앙SUNDAY S매거진이 한국어 매체로는 유일하게 그와 1대1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마주 앉은 자리에서도, 요시키는 전에 볼 수 없는 편안하고 명랑한 모습이었다.

‘엑스 재팬’의 공연 장면 (c) Tanya Braganti

23일 열린 ‘위 아 엑스’의 월드 프리미어가 성공리에 끝났다. 기분이 어떤가.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내일 눈을 뜨면, 누군가가 모든 게 꿈이었다고 말할 것 같다. 사실 영화를 보는 90분 동안 10번 정도 울었다. 스티븐 키악 감독이 고통으로 얼룩져 있던 나와 엑스 재팬의 역사를 예술로 승화시켜 줬다.”


다큐멘터리 출연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대중 앞에선 늘 비밀스럽기만 했는데, 갑자기 이처럼 솔직하게 개인사를 털어놓은 게 놀랍다. “내 미국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윌리엄 모리스 엔데버의 에이전트가 2008년부터 계속 다큐멘터리 제작을 권유했었다. 엑스 재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널리 알려야 한다며 날 설득시키려 했다. 그때만 해도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이제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세상과 통하는 문을 굳게 걸어 잠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 문을 열 때라는 느낌이 온 것이다. 꼭 영화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정신적으로 필요한 결심이었다. 문을 연다는 것은, 내 어두운 과거를 떠나 보내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맞이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영화를 보면 당신의 삶은 ‘고통’과 ‘음악’이란 키워드로 채워져 있는 듯하다. “고통은 한 순간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친구이자 적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내 음악의 원천이자 영감이기도 하다. 아직도 매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다. 음악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이다. 난 나 자신을 ‘생존자(survivor)’라고 생각한다.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영화를 통해서도 대중에게 그런 희망의 메시지가 전달이 됐으면 한다.”


요즘 들어 가장 고통스러운 건 뭔가. “육체적으로는 건초염이 점점 심해져 힘들다. 의사는 계속 수술을 권하는데, 혹시라도 잘못되면 영영 피아노를 못 칠까 두려워 주저하고 있다. 혹시나 다른 치료법이 나오지 않을까 바라고 있다. 정신적으로는 늘 나를 따라다니는 ‘네거티브 요시키’와의 싸움이 견디기 어렵다. 미국으로 건너와 살면서 계속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봤지만,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나 히데, 타이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너무나 괴롭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기 일쑤다. 결코 바뀌지 않을 과거를 안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려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다. 지난주엔 멤버 중 파타가 혈전 이상으로 ICU에 입원하는 위기가 있었다. 영화제에 오기 직전에 얼굴을 보고 왔는데, 엑스 재팬의 굴곡진 역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파타는 조금씩 건강을 되찾고 있다.”


영화를 보면 특히나 먼저 세상을 떠난 멤버 히데와 타이지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우리는 엑스 재팬의 멤버가 7명이라고 생각한다. 새 멤버인 히스, 스기조와 더불어 히데와 타이지도 늘 우리와 함께 공연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선다.”

2016 선댄스 영화제를 찾은 요시키. 사진 AP

녹음이나 공연이 없을 땐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지 영화에 나오질 않던데, 쉴 땐 뭘 하나. “쉴 때라…, 쉴 때도 피아노를 친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음악밖에 없나보다(웃음). 사실 내겐 작곡이 너무 쉽다. 거의 매일 곡을 쓴다. 성격이 까다로워서 곡을 고르는 게 어려울 뿐이다. 게다가 아직도 모든 곡의 총보를 일일이 다 만든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내가 칠 드럼 비트 하나하나부터 멤버들이 연주할 악기마다 모조리 악보로 그린다. 아마 내가 죽고 나면, 엄청난 양의 악보를 찾을 수 있을 거다. 하하.”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했었다. “2011년 서울 콘서트로 아시아 투어를 시작했었는데,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놀라웠다. 엑스 재팬과 힘들었던 오랜 여정을 함께 해준 팬들에게 정말 고맙다. 한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다. 빨리 다시 돌아가 공연하고 싶다. 요샌 한국 음식에도 푹 빠져 있다. 오래전에 프로듀싱했던 그룹 트랙스 멤버들과의 작업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노민우군과는 SNS 등을 통해 아직도 연락을 주고 받는다.”


한일 양국 관계 때문에 여전히 일본 음악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진 이들도 있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참 민감한 문제다. 하지만 뮤지션이자 아티스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저 음악을 통해 양국을 하나로 만드는 데 공헌하고 싶다는 바람밖에 없다. 음악엔 그 어떤 경계도 없으니까. 한국의 많은 아티스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리라 믿는다.”


2016년의 계획은. “엑스 재팬의 새 앨범이 곧 나온다. 20년 만에 나오는 앨범이자, 세계 시장을 겨냥한 첫 작품이다. 오는 3월 영국 윔블리 경기장 공연을 시작으로 월드 투어도 준비 중이다. 오케스트라와 하는 솔로 투어도 구상하고 있다. 본격적인 미국 활동도 다시 한번 도전해 볼 계획이다. ‘위 아 엑스’가 또 다른 시작의 발판을 마련해 줄 것 같다. 영화는 벌써 다양한 제안을 받아 배급을 논의 중이다. 가능하면 영화가 상영될 모든 도시를 방문해 팬들과 만나고 싶다.” ●


파크시티(미국 유타주) 글 이경민 기자 lee.rachel@koreadaily.com?


사진 AP·Passion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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