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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극복하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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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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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서울대 의대 교수
신경외과학

이른 새벽부터 신경외과 의사의 일과가 시작된다. 콘퍼런스와 병실 회진을 마치고 서둘러 수술실로 발길을 옮긴다. 수술실 입구는 벌써 북새통이다. 환자가 누운 침대가 줄을 이어 수술실 문턱을 넘는다. 가족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웃으며 손을 잡아 주는 이도 있지만 눈물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구르는 침대가 친지들의 애타는 시선을 뒤로하고 수술실 안으로 멀어져 간다.

 신경외과 의사와 뇌종양 간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가 시작된다. 고독하고 긴 여정이다. 수술 현미경 속에 모습을 드러낸 종양의 기세가 등등하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 같다. 그러나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 긴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안정시킨다. 천천히 종양을 쏘아보면서 수술을 시작한다. 권투선수가 시합 직전 서로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하는 형세와 흡사하다. 뇌수술도 운동경기와 마찬가지로 기싸움에서 밀리면 끝장이다.

 중요한 혈관이나 신경 근처를 지날 때는 극도의 긴장감에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다. 끈질기게 버티는 종양 때문에 손끝이 떨리기도 한다. 겁을 먹으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얕잡아 봐서는 더욱 안 된다. 대여섯 시간, 때로는 열 시간 이상 숨막히는 힘겨루기가 이어진다.

 어느덧 수술이 막바지에 이른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하던 중 어느 순간 뇌종양의 기가 꺾이는 것을 느낀다. 긴장이 다소 풀어진다. 이제부터는 원사이드 게임이다.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기진맥진한 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입안에서 단내가 난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으니 용변을 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기싸움에서 이겼다는 희열과 무엇보다 환자를 살렸다는 안도감에 혼자 빙긋이 미소 짓는다.

 수술 이외에 외래진료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다양한 환자를 만나야 하니 수술할 때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이 또한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점점 스러져 가는 악성 뇌종양환자를 만날 때는 할말을 잊는다. 수술 후유증인 반신불수 때문에 생업을 잃은 사람의 눈물을 보면서 신경외과 의사의 삶이 싫어지기도 한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외에도 구구절절 사연이 없는 환자는 없다. 심리적 부담이 수술할 때 못지않은 이유다.

 보람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건강을 회복한 환자가 수줍은 듯 건네는 고맙다는 인사말에 힘을 얻는다. 요즈음에는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발견된 뇌종양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주위에서 이런저런 병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더불어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보니 건강염려증이 고개를 든다. 가족들의 권고도 있고 해서 건강검진센터를 방문한다.

그런데 아뿔싸, 뇌에 작은 양성종양이 발견된다. 신경외과 전문의와 상담해 보라는 권고를 받는다. 덜컥 겁이 난다. 모르는 게 약인데 공연히 검사를 했나 하는 후회의 마음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영상기록이 담긴 자료를 들고 이 병원 저 병원 의료쇼핑을 시작한다.

 증상이 없는 작은 양성 뇌종양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정기적인 검사를 하면 될 일이다. 치료가 필요한 경우라도 비교적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 차분한 환자도 있지만 뇌종양이라는 말에 지레 겁에 질린 사람이 더 많다. 걱정하지 말라고 누누이 설명해도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무병장수는 많은 사람의 바람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듯이 찾아오는 질병을 막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슬기롭게 대처하는 것이다. 불청객이지만 잘 달래 돌려보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환자는 스스로 병과 싸워 이겨야 한다. 먼저 흥분하면 백전백패다. 신경외과 의사와 뇌종양 간의 대결처럼 절대로 기에서 밀리면 안 된다. 의사는 도와주는 사람이지 병과 대신 싸워 주는 것은 아니다. 병을 알고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붉은 원숭이 해인 병신년에도 모든 사람이 활기차고 건강한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김동규 서울대 의대 교수 신경외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