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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꿀도 단맛 안에 지겨움이 있다고 하였거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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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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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가천대학교 명예총장

요즘 우리 사회는 위안부 관련 한·일 외무장관 협상 결과와 일본 총리의 사죄 및 배상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거기에 야당 대표는 협상 결과가 국회 인준을 받지 않았으므로 무효라는 정치 바람을 불어넣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 같아 기억을 더듬던 중 국 내에서 사업하는 한 외국인 CEO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필자가 인사차 한국에서 사업하는 데 어려운 점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구체적으로 노사 간 협상 행태를 지적했다. 요컨대 어렵게 도출한 노사 간 합의 결과가 노동조합원의 동의 절차를 밟으면서 무효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표권 없는 대표와 협상하느라 그토록 진을 뺐다는 생각에 허탈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1970년대 브뤼셀에서 소맥(小麥)의 수출입 단가를 놓고 여러 관련 국가 대표들이 몇 날 며칠 밤샘 협상을 한 끝에 서독의 농림장관이 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독일 대표는 소맥 t당으론 가격 차이가 작지만 독일의 수입 총량으로 보면 엄청 큰 액수이므로 어렵게 이끌어낸 결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협상 결과가 알려지자 독일 농민 단체는 주무 장관의 무능을 지적하며 격하게 성토했다. 하지만 무효니, 재협상을 해야 한다느니, 국회 승인을 밟지 않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다음 선거에서 묻는 것이 민주주의 기본이고, 민주주의 꽃은 바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데 있다. 그래서 모든 정권은 4~5년 주기로 총선이라는 절차를 통해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좀 다른 이야기지만 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행정부와 사법부에, 그것도 대법원에 대고, 그리고 외국 정부에 대고 ‘사죄하라’고 외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사죄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다른 스펙트럼의 액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전쟁 중에 저지른 일본군의 반인륜적 만행을 일본인에게 그리고 세계 만방에 설득력 있게 알리고 고발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그에 따른 사죄 여부는 일본이 알아서 해야 할 몫임에 분명하다. 스스로 우러나 하는 사죄와 강요해서 받는 사죄는 격이 다르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 몫을 성공적으로 다했다고 본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권은 물론 사회 지식인들이 위안부와 관련해 일본 정부의 몰지각을 한목소리로 규탄하고 있다. 일부 일본 정치권과 지식인조차 일본 정부가 한국에,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배상 문제도 그렇다. 배상 액수를 놓고 일본 정부와 협상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인 윤리성을 흩뜨리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다. 자칫 배상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정신적·윤리적 무형의 높은 가치를 손상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이 여생을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 그래야 우리 후손들이 훗날 일본군의 만행을 논할 때 윤리적 우월성을 가지고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배상 문제와 관련해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오간 이야기가 생각난다.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가 전쟁 배상 문제를 언급하자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단호하게 돈은 필요 없다며 사과를 문서화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우리가 크게 반추해야 할 대목이다. 특히 1970년대 중국의 경제 사정을 감안하면 대단한 용단이 아닐 수 없다.

 근래 “사죄하라” “사죄하라”는 구호를 들을 때마다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말이 생각난다. “꿀은 그 단맛에 지겨움이 있고 달아서 입맛을 버려놓는다(The sweetest honey is loathsome in his own deliciousness. And in the taste confounds the appetite)”고 한 역설적인 ‘달콤함의 함정’이 가지는 뜻을 되새기게 되었다.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차분히 생각해 볼 될 때가 오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이성낙 가천대학교 명예총장

 ◆약력 : 뮌헨대 의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