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전략적 침묵, 북 수소탄 성공 주장 무시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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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워싱턴 의회 의사당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마지막 국정연설을 했다. 예상과 달리 북한 핵실험은 언급되지 않았다. [워싱턴 AP=뉴시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재임 중 마지막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거론하지 않는 무언의 ‘대북 메시지’를 내놓았다.

“우리 군대는 세계 역사상 최고”
북 도발 땐 행동으로 응징 암시
중국 겨냥 “어렴풋한 수퍼파워”
“현재 위험의 원인 아니다” 강조

2013년 오바마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핵 실험을 강행한 북한에 대해 “도발은 고립만 심화시키며 우리는 국제 사회와 함께 단호한 조치를 주도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당시와 상황이 비슷한 이번엔 1시간의 국정연설에서 ‘북한’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미국 대외 정책의 현안 국가들인 이란·쿠바·시리아·우크라이나는 물론 이라크·베트남·콜롬비아까지 거명했지만 정작 ‘수소탄 성공’을 주장한 북한은 아예 빠졌다.

 외교 소식통은 “이번 국정연설은 이슬람국가(IS)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국내용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는 점도 있지만 이제는 북한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취지로 보인다”며 “말을 하면 속내를 내보이는 만큼 말조차 꺼내지 않는 전략적 침묵”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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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불용이라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으며 북한이 핵으로 뭔가를 얻어낼 수는 없다는 의미다.

미국 정부는 현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강력한 대북 금융·무역 제재를 추진하고 있는 데다 미국 상·하원 역시 초당적으로 대북제재 법안 처리에 나서며 정부의 강경 기류를 뒷받침하고 있다.

 무언의 대북 메시지는 미국과 타협하거나 손을 잡은 이란과 쿠바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크게 대비된다. 미국 내 보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란 핵 합의를 밀어붙이고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를 이룬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은 자체 핵 프로그램을 되돌려 비축 우라늄을 해외로 반출했고 세계는 또 다른 전쟁을 피했다”고 말했다.

이날 이란이 표류하다 영해를 침범한 미국 해군 경비정 2척을 억류하고 있는 게 공개됐지만 국정연설 내용에선 변수가 되지 못했다.

쿠바에 대해선 “미국이 쿠바 국민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됐다”며 의회에 금수조치 해제를 공식 요청했다. 반면 북한은 생략하며 수소탄 강국에 올랐다는 북한의 주장을 무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럼에도 “동맹국들을 감히 공격할 수는 없다”는 말로 군사적 도발은 파멸임을 시사했다.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지킨 자신의 업적을 알리는 국내용 발언에 외부의 위협 세력에 대한 경고를 함께 담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때 “우리 군대는 세계 역사상 최고”라고 말할 땐 뒤에 앉아 있던 조 바이든 부통령과 공화당의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함께 기립해 박수를 쳤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국정연설을 농담으로 시작했다. 그가 “이번 마지막 연설은 짧게 해보겠다”며 “여러분 중 일부는 (대선 후보 경선이 열리는) 아이오와주로 빨리 가고 싶어하는 걸 안다”고 말하자 의원들의 폭소가 터졌다. 이날 본회의장엔 대선 경선에 나선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공화당),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무소속)이 앉아 있었다.

 이어진 국정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세계인들은 국제 문제가 생길 때 중국과 러시아에 기대지 않고 미국을 부른다”며 미국의 리더십을 부각시켰다. 그는 “현재가 위험한 시기인 까닭은 쇠약해진 미국의 힘이나 ‘어렴풋이 보이는 수퍼파워(looming superpower, 중국을 의미)’ 때문이 아니다”며 “오늘날 세계에서 우리는 ‘악의 제국들(evil empires, 러시아 등을 의미)’보다는 ‘실패한 국가들(failing states, 북한 등을 의미)’에 의해 더욱 위협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과도기의 중국 경제에서 역풍이 불고 있다”며 중국의 경제 불안을 국제적 위험으로 지목했다. “러시아는 궤도를 이탈 중인 우크라이나와 시리아를 떠받치는 데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고 비웃었다. 이슬람국가(IS)에 대해선 격멸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도 “3차 세계대전이 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 후회되는 일 중의 하나”라며 “정당 간의 적대감과 의심이 악화됐다”며 정치 양극화를 우려했다. 이어 “정치인들이 무슬림을 모욕하면 우리를 더 안전하게 하는 게 아니다”고 해 무슬림 입국 금지 등을 주장했던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를 사실상 비판했다. IS에 대한 융단 폭격을 주장했던 공화당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에 대해서도 “그건 TV 대사로는 먹힐지 몰라도 세계 무대에선 통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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