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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희 선생님은 늘 꽃사슴 같던 소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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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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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국립극단 ‘바꼬지’ 공연. 왼쪽이 고(故) 백성희, 오른쪽이 주인공 분이 역의 김금지. [사진 국립극단]

배우 백성희씨가 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1세. 1943년 데뷔한 고인은 73년 간 무대를 지켜온 한국 현대 연극의 산증인이다. 배우 김금지(74)씨가 본지에 추모글을 보내왔다. 김씨는 1959년 국립극단 연구소 1기생으로 국립극단 창단멤버였던 고인의 직속 후배이자, 57년 간 무대를 함께해왔다.

배우 김금지, 본지에 추모글
국립극단서 인연, 57년간 같은 길
1982년 ‘어미’ 작품 가장 못 잊어

 백성희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국립극단연구소 1기생 졸업식이었다. 나는 대표로 선생님으로부터 수료장을 받았다. 수료만 하면 배우가 될 줄 알았지만, 단원은 고사하고 여전히 연구생 신세였다. 하는 일은 대사 한마디 없는 엑스트라나 잘해야 행인 1·2·3과 같은 단역이었다.

그나마 난 배역을 맡을 기회가 있어 선생님 곁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고, 어깨 너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정확한 대사, 열정적인 태도, 최선을 다하지만 과하지 않은 연기 등 선생님은 교과서였다. 연습 시간은 결코 어기지 않으셨으며, 대사엔 1%의 오차도 없었고, 자세는 꼿꼿하고 품위 있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잘했다는 평을 받은 연극엔 언제나 선생님이 있었다. ‘산불’ ‘만선’ ‘이민선’ ‘수선화’ 등 주로 어머니와 딸 역할이었다. 1970년 국립극단을 나와 ‘극단 자유’로 들어갔는데, 선생님과 살갑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황송하게도 선생님은 내가 출연한 ‘겨울에서 가을까지’를 보시고선 분장실로 찾아와 “연기 좋다”고 말씀해주셨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시간은 1982년, 극단 황토의 ‘어미’란 작품을 올릴 때였다. 한·일 작가의 ‘어미’를 각각 올리는 모노드라마였다. 선생님은 한국의 어미를 맡았고, 여배우들이 그토록 탐내던 일본 ‘어미’ 역으로 나를 추천하셨다. 감히 말하건대 내 평생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언론에서도 주목 받았고, 상복도 터졌다. 선생님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셨다. 공연 당시 자신의 연기보단 “금지야, 결코 목 상하면 안 돼”라며, 마치 매니저처럼 매일 나에게 따뜻한 차를 타주셨다.

 선생님은 베푸는 손도 넉넉했다. 43년 동안 구둣가게를 해온 나는 예쁜 구두가 나오면 선물했는데, 선생님은 내가 드린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되돌려 주셨다. 선물 드리기가 죄송스러울 정도였다. 나한테만 그러신 게 아니었다. 연극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대학로 카페 ‘장’ 주인장께선 툭하면 “여기 오는 손님 중 지갑 가장 많이 여는 분은 백성희 선생”이라고 했다.

 선생님의 입원 소식을 듣고 나는 가지 않았다. 언제나 곱게 화장하신 모습만 보이셨는데, 창백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니 내가 그런 모습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난 혼자서 한참 흐느꼈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 선생님은 늘 그랬던 것처럼 꽃사슴 같은 소녀로 남아 있다.

연극배우 김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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