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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의 정신세계 강태공이 열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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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호 24면

강태공을 상상해서 그린 초상화.

‘강태공은 낚시꾼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자주 쓰는 강태공(姜太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명제다. 그의 극히 작은 면모를 본다면 이 말은 성립한다. 그가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바로 낚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속 실재했던 강태공이라는 인물의 면모는 그로써 다 헤아리지 못한다. 맞다. 그는 우선 낚시꾼이었다. 특이한 점은 몇 십 년 동안 낚시 바늘을 드리우기는 했지만 실제 물고기를 낚아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야기는 제법 귀에 익은 편이다. 짧은 낚싯대, 굽지 않고 곧게 펴진 낚시 바늘, 더구나 그 바늘에는 미끼도 달지 않았다.


형편이 그러니 강태공이 드리운 낚시에 물고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크게 낚았다. 세상의 권세와 부, 그를 이루게끔 했던 왕조 권력자의 무한한 믿음을 말이다. 중원에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상(商)나라 주왕(紂王)은 힘은 있었으나 패악무도(悖惡無道)한 혼군(昏君)이었다. 그로부터 서북쪽의 한 구석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던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간절한 바람이 하나 있었다. 상나라를 제압할 의지와 역량을 갖춘 현자(賢者)를 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업을 이룰 만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문왕의 귀에 “강가에서 짧은 낚싯대와 고기가 물지 않는 곧은 바늘을 드리운 사람이 늘 나와 앉아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중국 최초 통일왕조인 진(秦)나라 시황의 병마용 모습. 그 안에 들어선 수많은 토용들이 보여주듯이 중국 문명의 초기 모습은 군사와 전쟁의 색채가 아주 강했다. 사진 조용철

강가에 낚시 들고 나타난 사람기이한 노인네였다. 벌써 70줄을 넘긴 백발의 범상치 않은 모습의 사내가 물고기가 물지 않는 바늘, 그마저도 물속에 담그지도 않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하염없이 앉아 있다는 점이 그랬다. 그는 직감했다. 중원의 상나라를 제압하고 천고의 패업을 이루게끔 자신을 도울 현자가 바로 그 늙은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 뒤의 이야기는 흐뭇하다. 폭정을 일삼던 상나라의 주왕을 몰아내고 주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강태공이 수행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희대의 군사 전략가요, 정치가였으며, 아울러 행정가였다. 그러나 중국인이 강태공의 진면목을 평가하는 언어적 표현은 ‘도략(韜略)’이다.


중국 역사는 퍽 장구하다. 아울러 복잡하다. 아주 많은 이질적인 요소가 뭉쳐지면서도 나름대로 매우 오래 동안 균질(均質)함을 확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장구한 중국 땅과 사람의 역사 속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전통 하나로 꼽히는 게 있다. 바로 ‘모략(謀略)의 정신세계’다. 여기서 도략과 모략은 같은 맥락이다. 만장한 중국의 그 모략이라는 정신세계에서 첫 장을 열어젖히는 인물을 꼽으라면 강태공이 단연 우선이다. 그는 기원전 12세기에 태어난 인물로 추정한다. 중국 문명의 이른 아침이라고 꼽을 수 있는 춘추시대가 닥치기 전 400여 년 앞서 태어난 셈이다.


흔히 도략이 싸우는 방법, 즉 전략을 일컫는 단어로서 춘추전국 시대 백가(百家) 사상 가운데 병가(兵家)라는 일파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지만, 속내는 그보다 더 포괄적이다. 다툼과 싸움, 나아가 전쟁은 문(文)과 무(武)를 다 아우른다. 형식이 직접 피를 부르느냐 아니냐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머리싸움이 때로는 피를 동반하는 직접적인 싸움보다 훨씬 더 잔혹할 수 있다. 도략과 모략은 싸우는 방법과 내용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강태공은 흔히 중국의 도략과 모략의 정신세계를 일컬을 때 그런 흐름을 창시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저 창시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고(高), 대(大), 전(全)’의 세 글자도 함께 붙는다. 가장 높게(高), 아주 넓게(大), 빠짐없이(全)’ 모략의 정신세계를 이뤘다는 점에서다. 그는 실제 내용이 전해지는 병서(兵書) 『육도(六韜)』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기나긴 모략과 병법의 전통에서 첫 물꼬를 튼 책으로 평가 받는 저작이다. 그로부터 비롯한 중국 모략, 병법의 세계는 손자(孫子)의 병법을 거쳐 수많은 군사와 정치·사회·문화 일반의 모략 전통으로 이어진다.


중국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중국의 역사 흐름에 자리를 튼 아주 흥건한 피의 장면들 때문이다. 때로는 피로 걸러진 문명의 광채를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화려한 중국의 사상과 철학, 문화의 백그라운드를 따지자면 우선 사람 사이의 잔혹한 싸움으로 점철한 전쟁의 역사가 먼저다.


일부 중국 역사가들의 통계를 인용하자. 중국 역사를 길게 잡으면 4000년이다. 흔히 반만년, 혹은 5000년으로 이야기도 하지만 근거는 희박하다. 길게 잡을 때 겨우 4000년이다. 그 기간 동안 ‘중국의 전쟁’을 꼽으면 얼마나 될까. 전쟁은 전투와 다르고, 교전 또는 접전 정도의 개념과도 다르다. 대량의 학살이 수반하는 큰 규모의 싸움이다. 중국 문헌 기록이 그 기준이다. 문헌에 기록할 정도의 혹심한 싸움이라면 ‘전쟁’으로 적어도 무방하다는 뜻에서다. 한 통계에 따르면 4000년 기간 중에 벌어진 ‘기록적인’ 전쟁의 횟수는 3700여 회로 나온다. 각 전쟁에 관한 세밀한 고증이 따라야 하겠지만, 중국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빈도가 매우 높다는 점은 이 추정치에 우선 기대서 이야기할 만하다.


해마다 피 바람이 감쌌던 대지거의 1년에 한 번 꼴로 치열한 전쟁이 중국의 대지를 뒤흔들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극단적인 싸움의 사례도 있다. 중국의 전쟁은 늘 인구의 이동을 부른다. 중국의 이민사(移民史)는 그래서 요즘 중국 역사학계가 새삼 주목하는 영역이다. 그런 인구의 이동은 또한 수많은 싸움을 부른다. 새로 이동한 사람이 낯선 땅에서 평화롭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먼저 있던 원주민, 다소 앞서 도착한 이민 그룹과 늘 싸움을 벌여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국 고고인류학의 태두(泰斗)로 꼽히는 리지(李濟·1896~1979)에 따르면 남부의 한 촌락이 한 해 동안 겪은 싸움(중국 민간의 싸움은 흔히 무기를 들고 목숨을 건 채 싸우는 ‘계투(械鬪)’로 적는다)의 횟수가 자그마치 130여 회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에 해당하겠지만, 365일 가운데 130여 일을 사람이 죽어 넘어지는 싸움으로 지샜다면 그런 촌락의 사람들은 어떤 정신세계를 키워야 했을까. 그 점이 알고 싶어 이제 시작하는 것이 이 연재 기획이다. 천진함과 그런 정서가 도져 이루는 난만함이 주조를 이룰 수는 결코 없었을 테다. 사람은 다부져야 했을 것이고, 그 의식은 똘똘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서는 밤낮없이 닥치는 전쟁의 풍운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다. 왕조의 잔혹한 수탈이라도 그에 가세한다면, 무심한 하늘과 땅이 홍수와 가뭄을 내렸다면 그 정도는 더욱 혹심했을 것이다.

어느 고고학자의 탄식앞서 소개한 리지(李濟)라는 중국 고고인류학의 태두는 퍽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서양의 학문 체계인 고고인류학의 기법으로 중국의 땅을 처음 뜯어보고 살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를 인용하는 서양의 중국학 관련 논문이 압도적이었고, 그가 키운 제자는 또한 중국 권역의 인류학과 고고학계에 즐비하다.


그는 이런 소감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문명의 초기에 이 중국 땅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라는 내용이다. 아주 강한 의문이었고, 한편으로는 탄식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다. 그가 처음 체계적으로 뜯어본 중국의 땅에는 성(城)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중국 문명이 자리를 잡을 무렵인 신석기 시대 말기의 땅을 뜯어본 뒤의 소감이었다. ‘도대체 왜 파는 곳마다 성이 나오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뒤를 따랐다. 성은 지키는 이, 공격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때 생기는 건축이다. 호랑이와 늑대를 막으려는 느슨한 울타리와는 성격이 달라도 퍽 다르다.

전쟁의 역사는 중국 대륙 곳곳을 성(城)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윗 사진은 중국 신석기 시대의 성터 모습.

그가 고고학의 삽을 들였던 중국의 모든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성이 나왔다고 했다. 그로써 그는 중국 문명의 초기는 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모습이라는 소감을 적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을 의미했다. 춘추가 벌어지기 한참 전, 강태공이 모습을 드러내는 문명의 새벽 훨씬 이전에 중국의 너른 대지는 벌써 전운(戰雲)이 늘 몰려다니던 곳이었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우리는 문득 시선을 멈추고 머릿속으로 여러 장면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하, 그랬구나, 바로 그런 게로구나, ‘메이드 인 차이나’의 그 오랜 명품, 바둑과 장기가 그래서 나온 것이구나’ 정도로 말이다. 또 감탄이 나올 법하다. ‘아 그랬던 것이로구나. 그래서 중국인은 늘 무협지를 지어냈던 게로구나. 아하, 그렇지, 중국인의 영화가 왜 십중팔구 무술을 주제로 펼쳐졌던 것인가를 알겠구나’하면서 말이다.


중국은 국가라기보다 문명이라고 봐도 좋을 대상이다. 한자를 근간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적 풍요로움으로, 방대한 면적과 이질적인 여러 혈통의 섞임으로 말이다. 이제 그 문명의 속내를 형성한 전쟁의 흔적을 따라 긴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아주 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우리에게 중국의 부상은 기회이자 도전이다. 그럼에도 중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크기와 너비, 높이에서 부족하다. 중국은 다양성이 혼재하다가 대일통(大一統)의 틀로 이질적인 요소가 묶이면서 벌어진 수많은 다툼과 전쟁의 역사과정을 보이고 있다. 전쟁으로 다져진 견고한 모략의 세계, 이를 마음껏 운용하는 현대 중국인들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중국통인 저자가 풀어놓는 중국 문명 이야기를 새로운 기획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유광종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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