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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고졸채용 할당제 시행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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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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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코람코자산운용 대표

사람은 물구나무서기를 한 상태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 상태가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저출산고령화, 노후 대비조차 어렵게 하는 교육비 부담, 세계 최고의 대학 진학률에도 불구하고 턱없이 낮은 취업률 등으로 우리나라는 이미 불안정한 물구나무서기를 시작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10월 현재 청년실업률(15~29세)은 7.4%다. ‘구직단념자’ 등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체감 청년실업률은 이보다 훨씬 높다. 통계개발원이 12월 초 발간한 ‘2015 한국의 사회동향’에는 대졸자의 25~30% 정도가 교육받은 것을 제대로 활용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시됐다. 과잉교육이라는 의미다. 한국 대학진학률은 세계 최고(71%)인 반면 이에 상응하는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열은 식을 줄 모른다. ‘2015 세계 속 EU’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지출 중 교육비 비중은 미국의 3배, EU의 6배 수준이다. 연간 30조원에 달하는 사교육비가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로 ‘늙어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노후를 대비할 여력이 없다. 에듀푸어가 실버푸어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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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업이 안 되다 보니 졸업을 미루는 학생들 역시 늘어난다. 여학생은 6년, 남학생은 군대로 인해 8년씩 대학에 다니는 경우가 다반사다. 결혼연령이 늦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갈수록 늦어지고 있는 취업 및 결혼 연령은 저출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 같은 복잡한 문제를 푸는 해결방안은 어디에 있을까. 가장 좋은 방안은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을 지속하고 교육수준에 맞는 일자리 창출이 원활히 이뤄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한국 경제는 이미 저성장에 직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교육의 출구전략을 바꿔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의 대졸 채용 중심 정책을 대졸과 고졸의 병행 채용 정책으로 변경하는 방법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 또는 창업이 활성화된다면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줄이는 동시에 청년실업을 줄일 수 있다. 과도한 교육비 부담을 덜 수 있고, 과잉 교육으로 인한 불만 역시 줄일 수 있다. 조기에 취직함에 따른 경제적 안정으로 결혼 및 출산 연령도 낮아질 수 있다.

 고졸 취업은 지난 MB정부에서 사회 화두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무엇보다 정책의 일관성이 필요하다. 수시로 바뀌는 정부 정책을 믿고 과연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을까.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고졸 채용에 대해 적어도 3년 이상에 걸친 예고제가 필요하다. 그래야 중학생이 진로를 감안해 고등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 기업도 직무기술, 채용 및 경력개발 등 인력과 관련된 구조적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정책대상의 범위도 마이스터고·특성화고뿐 아니라 일반고 졸업생들의 진로도 포함해 확장시켜야 한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시장의 자율에만 의존하기에는 힘든 측면에서 한시적으로나마 고졸채용 할당제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학력에 대한 사회인식이 바뀌도록 해야 한다. 몇 년 전 시청률이 높았던 주말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대학 졸업 후 놀고 있던 첫째·둘째 사위가 고등학교를 나와 중소기업에 다니는 예비 셋째 사위에게 하는 첫말이 “대학 어디 나왔나”였다. 그 질문에 얼굴이 불거졌던 셋째 사위의 얼굴이 생생하다. 학력으로 판단하는 인식의 근절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가정환경조사서에부터 부모의 직업 및 학력란을 삭제하고, 취업이력서에서도 부모 관련 사항을 삭제하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청년들에게 다양한 직업 및 인생루트를 보여주어야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공대 진학을 꺼렸던 학생들의 분위기가 최근 ‘문송(문과여서 죄송합니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변화한 것을 보면 다양한 진로를 보여주면 변화는 충분히 가능하다.

 셋째, 고등학교도 급격히 변화하는 산업환경에 적합한 인력을 공급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각 학교에 3D 프린팅 시설을 갖추어 벤처창업 등을 위한 실험 여건을 마련하는 방법은 어떨까. 최근 조성되고 있는 ‘청년 희망펀드’를 활용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넷째, 남학생의 경우 군대로 인해 고졸 취업 후에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군입대의 경우 회사 휴직과 복직이 가능하도록 해서 업무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졸채용할당제는 우리 사회가 불안정한 물구나무서기에서 벗어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제 고졸취업 또는 창업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는 실용정신으로 사회의 가치가 이동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기회의 사다리를 놓아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고, 역동성을 유지하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이현승 코람코자산운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