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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한국노총, 노사정위 탈퇴수순? 개혁 크레바스 빠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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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새해 첫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회의에 불참했다. 7일 오전 7시30분부터 열린 '노동시장구조개선특위'에 나타나지 않았다. 노동시장구조개선특위는 노사정의 부대표급(정부는 차관)이 참여하는 회의다. 한국노총은 8일 열리는 노사정 신년회에도 나가지 않기로 했다. 신년회는 매년 노사정 관계자와 학자가 모여 인사를 나누는 자리다. 한국노총은 이에 그치지 않고 11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노사정 대타협 파기와 노사정위원회 탈퇴여부를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사회적 관계를 전면 폐쇄하고,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연초부터 노사정 관계가 얼어붙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진원은 노정갈등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노총 내부문제도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노총이 노사정위 회의에 불참한 이유는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말 내놓은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개정 문제를 다룬 행정지침 논의 초안이다.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한 토론장에서 발표했다. 이걸 두고 한국노총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지침을 발표했다"고 주장하며 반발하고 있다. 고용부는 "논의를 위한 안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9·15 노사정 대타협 당시 노사정은 두 지침과 관련, "협의해서 처리한다"고 합의했다. 이를 근거로 한국노총은 "논의도 하지 않고 발표하는 건 일방적 추진의사를 드러낸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익명을 요구한 학자는 "노사정 논의는 터놓고 해야 한다. 따라서 논의 안을 공개한 것을 일방추진으로 보긴 어렵다. 정부 안을 보고, 그에 맞대응할 한국노총 자체 안을 내놓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오히려 한국노총이 스스로 노사정 대타협에서 합의한 선(先)협의 약속을 깨는 것이란 얘기다. 고영선 고용부 차관은 "노사정 대타협 정신을 훼손하면서 협의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일은 없다"고 못박았다. 김대환 노사정위원장도 "협의를 하기 위해선 각 주체들이 논의를 위한 초안을 내놔야 한다"며 사실상 정부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또 다른 전문가는 "한국노총이 아예 2개 지침을 논의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친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한국노총 내부 문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노총 내 강경파는 9·15 노사정 대타협이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다수결로 승인된 뒤에도 꾸준히 파기를 주장하고 있다. 노사정위 탈퇴까지 거론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도부가 여기에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솔솔 흘러나오는 이유다. 송위섭 노동시장구조개선특위 위원장이 이날 회의에서 "아무리 어려운 사정이 있겠지만, 노동계가 협의 자체를 기피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영계는 이런 갈등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정부의 논의 초안을 보고서다. 경영계는 일반해고와 관련된 내용을 보고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이형준 노동정책본부장은 "판례보다 더 엄격하게 만들어 해고를 아예 못하도록 장벽을 치고 있다"고 말했다. 모 경제단체 관계자는 "괜히 (일반해고 문제를) 잘못 건드렸다. 지금처럼 법에 맡기는 게 낫다"며 '적극 추진'에서 '방관'으로 선회하는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오히려 노동계의 '쉬운 해고' 프레임이 완전히 무너졌는데, (노동계가 계속 반발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우리로선 나설 이유가 없다"고도 했다.

어쨌든 한국노총은 노사정위 탈퇴까지 언급하며 강경기조를 바꾸지 않고 있다.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은 "결단을 내릴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여러 사정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노총이 사회적 대화 포기의 길을 선택하진 않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찮다. 익명을 요구한 학자는 "1년 여 동안 논의해서 나온 결과물인 타협문에 사인한 게 엊그제다. 그런데 뚜렷한 대안도 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요구사항만 관철하기 위해 그 방대한 노사정 대타협문을 모두 휴지조각으로 만들 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투쟁동력이 없는 상황에서 합의를 파기하는 건 정치적 행위로 비칠 수 있다"며 "선거철마다 정치권 진출을 놓고 빚어진 내부갈등을 상기하면 총선과 관련된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말했다.

향후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든 당분간 노정 갈등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혹시라도 한국노총이 노사정 대타협을 부정하거나 노사정위 탈퇴로 이어지면 노사정 각 주체가 모두 크레바스에 빠지고, 노동개혁도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에 따른 후폭풍이 만만찮을 전망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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