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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성 기자의 교육카페] 복제본 들고 사인 받으러 온 아이들 … 작가는 힘이 빠집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전업 작가인 김모(43)씨는 지난해 11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방과후 독서 수업을 지도하는 교사가 “아이들이 작가님의 동화를 좋아한다”며 일일교사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겁니다. 뿌듯한 마음에 김씨는 학교를 찾아갔고 학생들에게 작가 생활과 작품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수업 직후 김씨는 예상 못한 좌절감을 맛봤습니다. 서명을 받고자 모인 학생들이 내민 책은 죄다 무단 복사된 불법 제본이었어요. 알고 보니 출판사가 발행한 책은 교사가 구매한 한 권뿐이었습니다.

 불편한 마음을 눈치챈 교사는 “학교 형편이 넉넉지 않고 학부모 부담도 고려하다 보니 대개 도서관이나 내가 구입한 책을 복사해 본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인세로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 작가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죠. 김씨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글을 쓰려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데 아이들을 키우는 학교마저 창작자의 노력을 가벼이 여기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지난해 말 교육계는 컴퓨터 글꼴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글꼴 개발 업체를 대리한 어느 법무법인이 인천의 78개 초등학교에 경고문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가정통신문, 안내장에 서체를 무단 사용한 학교에 법무법인 측은 “개당 275만원의 유료 소프트웨어를 사지 않으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초·중·고교는 저작권에 관한 한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저작권법 제25조는 학교 교육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저작물의 일부를 복제·배포하도록 할 수 있게 허용하죠. 이 경우 저작권자에게 보상금을 줄 의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학교를 저작권의 ‘치외법권 지대’로 여겨선 곤란합니다.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이정아 법률상담관은 “일부의 오해와 달리 저작권법의 예외 조항은 학교, 교사의 모든 활동이 아니라 수업 등 학교 교육에 필수적인 경우로 한정된다”고 설명합니다. 수업과 직접 관련 없는 온·오프라인 안내문 작성에 유료 글꼴 프로그램을 쓰거나 학교 소개 홈페이지에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지 못한 사진을 올리면 일반 기업처럼 저작권법을 어기게 되는 거죠.

 이정아 상담관은 “특히 학교 업무용 PC는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데 전임자가 무심코 받은 글꼴이나 프로그램을 사용하다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가 잦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앞서 예로 든 동화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업 보조 교재라도 불가피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작품 전체를 복사하는 건 삼가야 합니다.

 저작권은 이용자 입장에선 이런저런 불편을 줍니다. 하지만 저작권은 창작자로 하여금 더 나은 질의 콘텐트를 창조하게 하는 원동력도 되지요. 요즘 고등학생의 희망직종 1위는 ‘문화·예술·스포츠 전문가’입니다(한국직업능력개발원). 작가·기자·화가·사진가·디자이너처럼 콘텐트를 창조하거나 배우나 운동선수처럼 자신의 활동이 콘텐트가 되는 직업이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학교, 교사가 저작권 보호에 한층 노력했으면 합니다.

천인성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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