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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손글씨 7만자, 9층탑이 되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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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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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점가에 필사(筆寫) 책이 인기다. 말 그대로 시나 소설, 경구나 성경 등을 한 자 한 자 옮겨 쓰는 책이다. 경쟁과 불안의 시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크다고 한다. 지난 1~2년 거셌던 컬러링 북(색칠하기) 열풍을 이어가는 모양새다.

예술과 수행, 한국사경 9인전
부처 깨달음 깨알처럼 옮겨 적어
박경빈 ‘묘법연화경 보탑도’ 2년
박계준 ‘1080 반야심경’은 4년 걸려

 필사는 동서고금을 꿰는 문화행위다. 활자가 발명되기 전,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주요 통로였다. 필사는 종교적 수행(修行)으로까지 승화됐다. 불교문화권에서는 사경(寫經)이라고 한다. 부처의 깨달음을 깨알처럼 옮겨 적고, 불경의 주요 내용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먹은 물론 값비싼 금과 은으로 글과 그림을 부렸고, 종이도 최상급을 썼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극치를 이뤘다. 정교하고 화려한 한국미술의 특징을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사경은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요즘 다시 한국미술, 한국서예의 빈틈을 메우는 장르로 조금씩 커가고 있다. 그 사경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는 대규모 잔치가 차려진다. 7~12일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열리는 ‘한국사경 정예작가 9인전’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경작가 9인이 함께한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사경 350여 점이 나오는 대규모 자리다.

  사경은 시간과 땀과의 싸움이다. 박경빈씨의 ‘묘법연화경 보탑도’(사진)를 보자. 가로 70㎝, 세로 200㎝ 크기의 한지에 ‘묘법연화경’ 7만여 자를 9층탑 모습으로 배치했다. 글자 크기는 2~3㎜ 남짓. 고도의 정신집중, 불교용어로 삼매(三昧)의 경지가 요청된다. 제작 기간만 2년이 걸렸다. 박경빈씨는 “수많은 착오를 겪으며 글자의 크기를 줄이고 또 줄였다. 9층탑 밑그림을 그리는 데만 1년이 걸렸다”고 했다.

 박계준씨의 ‘1080 반야심경’은 또 어떤가. ‘반야심경’을 4년여에 걸쳐 1080번 옮겨 쓰고, 이를 10권의 책으로 엮었다. ‘반야심경’을 한 번 쓰는 데 평균 4시간, 1080번이면 4300여 시간이 필요한 장정(長程)이다. 사경이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하는 선승(禪僧)의 참선에 비유되는 이유다.

 이번 전시는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사경의 변모도 보여준다. 전통사경 기법으로 기독교 성경을 담아내거나(김영애씨), 우리 고유의 민화적 요소를 도입하기도(허유지씨) 했다. 강경애·강충모·김명림·윤경남·조미영씨 등 참여작가 9인은 대부분 경력 20~50년의 베테랑들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경호 한국전통사경연구원장은 “예술·수행 모두 경지에 오른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보기 드문 일”이라며 “우리 사경의 다양한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02-720-1161.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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