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다른 동사에도 기회를 주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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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각종 행사가 잦은 연말연시다. 개인적인 송년회부터 회사 종무식, 다양한 모임의 크고 작은 술자리까지-. “선약이 있어 못 갔는데 어제 만남은 잘 가지셨나요?” “엊그제 가진 송년의 밤 행사 후유증이 좀 길게 가네요!” “토요일에 종무식 겸 산행을 갖자고 하는데 어때요?” 등과 같은 대화로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많다.

 연말 모임 얘기를 할 때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바로 ‘가지다(갖다)’이다. 만남도 가지고, 행사도 가지고, 종무식이나 산행도 모두 가지려고만 든다. “만남은 잘 가지셨나요”는 “잘 만났나요”로, “엊그제 가진 송년의 밤 행사”는 “엊그제 열린(개최된) 송년의 밤 행사”로, “종무식 겸 산행을 갖자”는 “종무식 겸 산행을 하자”로 고쳐야 어색하지 않다.

 영어의 ‘have’는 ‘가지다’ 외에 먹다·겪다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하는 동사다. 이를 직역한 문장 등의 영향을 받아 우리말 동사 하다·열다·모이다·만나다 등이 놓일 자리에도 ‘가지다’를 마구 쓰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말의 ‘가지다’는 손에 쥐거나 몸에 지니다, 소유하다, 아이를 배다, 마음에 품다 등의 의미로 사용될 때 자연스럽다. 모임을 치르다, 관계를 맺다는 뜻도 사전에 올려놓긴 했지만 우리말다운 표현은 아니다. 다른 동사들에도 기회를 줘야 글이 풍요로워진다.

 “자, 오전 11시에 기자회견을 가집시다” “회장이 금요일에 모임을 갖자고 전화 왔더라”처럼 말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자, 오전 11시에 기자회견을 합시다” “회장이 금요일에 모이자고 전화 왔더라”와 같이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듯 글을 쓸 때도 ‘가지다’ 대신 다양한 동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언어생활을 이끌어 나가야 할 신문 기사에서 이런 문장이 여과 없이 나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상회담을 가지다”는 “정상회담을 하다”로, “결의대회를 가지다”는 “결의대회를 열다”로, “순회공연을 갖다”는 “순회공연을 하다”로, “교류를 가지다”는 “교류를 하다”로, “왕래를 가지다”는 “왕래를 하다” 등으로 바꿔 주는 게 바람직하다.

이은희 기자 e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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