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보는 사설] 김영삼 전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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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2015년 11월 22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47년 경남고등학교를 나와 195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 비서로 정치에 입문해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다. 만 26세에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의정활동을 시작해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이후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제창하고 김대중과 함께 박정희 정권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펼쳤고, 1990년 3당 합당에 의해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12월 18일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지지를 얻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자신의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로 규정하고 ‘신한국 창조’라는 국정 지표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검찰 사정과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등 정치 개혁을 필두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제거, 국군보안사의 조직 축소와 명칭 변경, 금융실명제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을 통해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개혁철학과 개혁방향이 모호한 상태에서 대통령의 결단에만 의존해 개혁이 진행되면서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그 결과 임기 중 발생한 무수히 많은 사건·사고들뿐만 아니라 정경유착의 표본인 한보비리 사건 및 차남 김현철의 국정개입 등 일련의 사건으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설상가상으로 집권 말기에 발생한 외환위기 상황에서 IMF 관리체제를 수용함으로써 엄청난 국민적 비판 속에서 임기를 마감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 민주화에 청춘을 바쳤으며, 대통령에 당선되고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김영삼 대통령이지만 대통령 당선을 위해 군사정권과 손을 잡은 3당 합당과 국민을 고난에 빠뜨린 IMF 사태는 그의 그림자로 공과 과가 뚜렷한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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