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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조영래 ④ "불공 대신 드려 드릴까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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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의 '양심선언'도 조영래 작품

민청학련 사건으로 공안당국이 꺼낸 칼날을 조영래는 피했지만, 시인 김지하는 피하지 못했습니다. 74년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체포된 김지하에게는 사형이 선고됐습니다.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김지하를 살려 낸 것이 전 세계로 전달된 ‘양심선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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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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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표

(영래가) “지하를 살리기 위해서 그 양심선언을 써야 한다”고 했어요. 몇 번 피드백을 주고받고 했어요, 교도소에 있는 김지하씨하고.  그러나 대체로 조영래의 기획이고, 이 글의 내용도 조영래 스타일이거든.  김지하는 몇 가지 자기의 실질적인 경험이나, 아이디어를 제공했지 대체로 조영래가 썼다고 봐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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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학규

전병룡씨라고 교도소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 양반은 제가 72년에서 73년까지 구속돼 있을 때도 바깥 연락을 해주고 했습니다. 그분이 인권운동하는 사람들을 다 연결을 해 줬습니다.

조영래가 양심선언의 틀을 쓰고 김지하가 안에서 다 읽어보고 또 자기가 고칠 거 고치고 그랬습니다.

필체가 나가면 안 되니까 맨 앞장이랑 맨 마지막만 김지하가 직접 그 안에서 조그만 변소용 휴지에다가 썼어요. 두루마리 휴지가 아니고 교도소 휴지 뻣뻣한 게 있었습니다.

가운데 필적을 숨기기 위해서 타이프를 쳐야 되는데 서울에선 타이프 칠 사람을 구하지를 못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춘천에 수녀원에 가서 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수녀가 타이핑을 쳤고, 그걸 갖고 서울에 와서 등사를 해서 그걸 사진을 찍어서 필름을 일본으로 내보냈죠.

일본에 그때 오재식 선생이라고 한국 교회하고 세계 교회를 연결해주는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아시아교회 협의회 사무실. 거기가 연락 거점이 돼서 선교사들이 오거나 외국 여행객들이 올 때 외국의 문서를 갖고 오고 여기 문서를 내보내고 그랬습니다.

국내에선 제가 NCC 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국내외 인권 관련 성명서, 선언문, 또는 기록 이런 거를 일부는 우리 사무실에서 미국 여직원이 번역을 해서 보냈습니다. 그 자체를 내보내기도 하고 좀 위험하다 싶은 거는 사진을 찍어서 필름을 내보내기도 하고 그랬죠.

◆ "안 되겠다. 도저히 못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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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도빈

76년 7월 초 아주 더운 날에 조 변호사가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북아현동 산동네 허름한 방에 기거했는데, 온몸에 땀띠가 나 있었습니다.

도빈 : "그런데 왜 오라고 그랬냐?"

영래 :  "야, 이제 앞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90살까지 집권한다면) 30년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내가 일본 가게 네가 좀 준비해봐라."

도빈 : "알았다."

당시 전 은행에 다녔는데, 3일 휴가 내고 경남 삼천포에 있는 제 친구에게 가서 배를 하나 예약했습니다. 저는 한 5년 감옥살이를 할 각오를 했죠. 8월 며칟날 떠나기로 하고서 조 변호사에게 갔습니다.

도빈 : "다 준비해 놨다."

영래 : "야, 나는 저기 못 가겠다”  “안 되겠다. 도저히 못 가겠다."

그래서 그걸 취소했습니다. 그때 큰 애가 돌도 안 됐을 때에요. 처자식 생각하면 도저히 안 되는 일이었던 거죠. 지금 같으면 핸드폰을 전화를 했을 텐데… 제가 다시 올 때까지 말도 못 했던 거죠. '조 변호사가 그때 만약에 나갔다면, 그때부터 80년 초까지 5년 가까이 나가 있는 건데, 그랬다면 그런 스트레스가 안 쌓이고 나가서 활동을 했으면 암이 안 생겼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은 취소한 걸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처자식 안 떼어 놓은 건 잘 했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이 이야기를 그때는 '평생 묻고 간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한다' 생각했는데… 결국은 80년도 지나 집사람한테는 얘기를 했습니다.

◆ "스님 대신 불공드려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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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학규

한 번은 서울에서만 있으니까 답답하다, 좀 바깥에 좀 나가고 싶다고 해서 월정사에 갔습니다.

여익구라고 하는 사람이 '멱정'이라는 법명으로 스님 생활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월정사는 워낙 절이 커서 사람들 눈이 많아서 있을 수가 없어서 말사 어디를 소개해줘 갔어요.  산 아주 깊었습니다. 어느 절인지는 지금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거기 가서 며칠을 있다가 저는 한 댓새 있다 오고 영래는 거기서 한 2∼3주 더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조영래 변호사가 워낙 고등학생 때부터 룸비니라는 불교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또 불경도 아주 잘합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고 반야심경의 뜻을 조영래가 쭉 하나하나 설명을 해줘서 제가 그때 공부한 기억도 나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가 스님이 한 분밖에 없는 절이었는데 스님이 출타했을 때 어떤 신도가 불공을 드리러 왔었습니다. 스님이 없어서 난감해하니까 조영래가 “제가 해 드릴까요?”  그러더니 불공을 드려주더라고요.

하여튼 어려운 사람들, 항상 어려운 사람, 힘없는 사람 편에 서 있고 그런 어려운 걸 보면 어떻게든지 도와주려고 했었죠.

정리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편집   박가영 기자 · 김현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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