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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성 기자의 교육카페] 올 1월 붙인 낡은 놀이터 접근금지 테이프 … 안 떼고 해 넘길 건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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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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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폐쇄된 아파트 놀이터.

“아빠, 놀이터 가자!” 소파에 누워 있는 제게 두 딸이 외칩니다. “날씨가 추워 감기 걸린다”는 경고도, “숙제를 못 끝내면 엄마한테 혼난다”는 협박도, “차라리 TV를 보자”는 회유도, 이럴 때는 별 소용없죠.

 옆 동 아파트 뜰에도 놀이터가 있건만, 두 딸은 한사코 훨씬 먼 상가 옆 놀이터로 향합니다. 넓이나 놀이기구는 비슷해도 놀러 오는 또래가 많아 좋다고 합니다. 도착하자마자 8살 첫째는 언니들이 놀고 있는 미끄럼틀로 뛰어가네요. 초면이지만 간단한 통성명 뒤 함께 술래잡기를 합니다. 유치원 친구를 만난 5살 둘째는 함께 ‘씽씽카’를 탑니다. 지켜보던 제 마음까지 훈훈해집니다.

 아이들에겐 ‘놀이가 밥’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놀이기구와 친구가 많은 놀이터는 ‘풍성한 건강 밥상’인 셈이죠. 실제로 캐나다 워털루대 연구진의 조사 결과 1㎞ 안에 놀이터가 있는 집에 사는 어린이가 정상 체중일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집에 사는 어린이의 5배라고 합니다. 근처에 놀이터가 없는 애들은 소아비만 가능성이 26% 증가한다는 연구도 있죠(미국 보건후생부, 2010).

 하지만 모든 어린이가 ‘놀이터의 행복’을 누리는 건 아닙니다. 지난 1월 국민안전처는 놀이터 1696곳을 잠정 폐쇄했습니다. 검사 결과 기준 미달로 판정받았거나 검사를 아예 안 받은 곳입니다. 안타까운 건 당시 폐쇄된 놀이터 중 절반(833곳)이 열 달이 지난 지금껏 방치된 상태라는 겁니다. 1차적 원인은 비용입니다. ‘폐쇄 놀이터’는 대개 노후 민간아파트에 있습니다. 주민 형편상 수천만원에 이르는 수리비용을 마련하기 힘든 곳이죠.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광주지역본부의 박수봉 복지사업팀장은 “대부분 지은 지 30년 된 노후 아파트라 사정이 넉넉지 않다. 외벽 페인트칠, 방수 공사도 못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법의 허점도 있습니다.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엔 기준 미달 놀이터를 폐쇄하는 규정은 있어도 언제까지 고쳐 재검사를 받으라는 조항은 없거든요. 세이브더칠드런의 제충만 간사는 “폐쇄 상태로 둬도 관리자에겐 불이익이 없으니 놀이터에 둘러진 빨간색 접근금지 테이프가 삭을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는 곳이 많다”고 전합니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나서고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진월아파트 놀이터는 지난달 27일 폐쇄 열 달 만에 다시 아이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지역 기업, 시민의 후원으로 녹슬었던 미끄럼틀·그네를 고쳤고, 지저분했던 바닥은 넘어져도 안전한 고무 소재로 바꿨습니다.

 ‘놀이터에 가면 친구가 있고/놀이터에 가면 재미있는 기구가 있고/할 거 없을 때 가면/좋은 친구가 되기도 한다’. 열 달 만에 놀이터를 되찾은 진월아파트 어린이의 동시입니다. 광주광역시 의회에는 최근 노후 아파트 놀이터를 고치는 데 예산을 지원하자는 조례가 발의됐습니다. 더 많은 어른, 지자체가 어린이 놀이터를 되살리는 데 힘을 보탰으면 합니다.

천인성 기자 guch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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