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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대화 의지 재확인 … 의제 포괄적 접근에 성패 달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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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호 3 면

남북 당국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접촉이 열린 26일 오후 판문점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서 남측 수석대표인 김기웅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오른쪽)이 북측 수석대표인 황철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통일부]

지난 26일 남북한 실무접촉을 계기로 당국 회담의 틀이 마련됐다. 장관급이 아니라 차관급이고, 서울과 평양이 아닌 개성이지만 8·25 합의에 따른 남북 당국 회담 개최가 가능하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제21차 장관급 회담을 마지막으로 남북의 정례적인 고위급 대화채널은 중단됐다. 이명박 정부 이후 돌발 사안이나 돌출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 당국이 마주 앉은 적은 있지만 제도화되고 안정적인 당국 대화는 그동안 재개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개성공단 폐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실무회담, 이산가족 상봉 등과 관련한 고위급 접촉, 그리고 휴전선 일대에서 조성된 긴장을 해결하기 위한 ‘2+2 회담’이 열린 적은 있다. 하지만 이슈 중심의 일회성 회담에 그쳤다.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당국 회담의 틀은 시작하지 못했다. 비록 차관급이지만 8년 만의 당국 회담 재개가 반가운 이유다.


애초 우려했던 회담 대표의 격(格)과 관련해 남과 북 모두 차관급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2013년 장관급 회담의 결렬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회로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남측이 ‘통·통(통일부와 통일전선부) 라인’을 고집하는 것도 사실 무리였다. 북측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계속 내세우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이에 따라 남북 모두 차관급을 대안으로 제시해 대표의 격 문제로 인해 실무접촉이 결렬되는 상황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합의 않기로 ‘합의’한 실용 접근 빛나또한 8월 2+2 회담이 사실상 대표 사이의 협상을 넘어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간접 협상으로 진행됐던 전례에 비춰 보면 굳이 대표의 격 문제 때문에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할 필요가 없다는 실용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양측의 신경전이 예상됐던 회담 의제와 관련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현안 문제’로 표현함으로써 사실상 의제를 구체적으로 합의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의제를 지나치게 고집함으로써 실무접촉이 결렬되는 위험을 피하고 일단 당국 회담 자체가 성사되는 것에 의미를 둔 남북의 현실적 타협책으로 해석된다. 오랜만에 마련된 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국 회담의 판 자체를 깨지 않겠다는 남북 양측의 현실적 고려가 읽히는 대목이다. 사실상 회담 의제를 차후 당국 회담으로 넘겼다. 이른바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현명한 외교전술이 남북 모두에 수용된 셈이다.


이번 실무접촉의 합의는 결과적으로 남북이 서로 대화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한 것도 의미가 있다. 앞으로 예상되는 장애물과 이견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8·25 국면’을 이어가겠다는 남북 양측의 노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사건 이후 타결된 8·25 합의는 매우 극적이었다. 지뢰 도발과 대북 확성기 심리전 방송 재개가 맞물리면서 남북의 군사적 긴장은 당시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고조됐다. 포 사격과 이에 대한 맞대응이 있었고 48시간 최후통첩이 지나면 남북 모두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갔다. 막판에 극적인 협상이 시작되고 지루한 마라톤 협상 끝에 도출된 8·25 합의는 그래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성과였다. 극적인 긴장 고조 끝에 얻어진 8·25 합의는 최근까지 남북관계를 이끄는 주요 동력이 되고 있다. 합의에 따라 북측의 유감 표명과 준(準)전시상태 해제가 이뤄졌고 남한은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됐고 각종 사회·문화 교류가 진행됐다. 따라서 이번 실무접촉의 합의에 따라 향후 당국 회담이 열린다면 남북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8·25 국면’이 지속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주요한 기회가 마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남북관계의 ‘8·25 국면’이 ‘8·25 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게 된 셈이다.


남북관계 개선은 화룡점정의 과제이 때문에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증진을 위해서는 12월 11일 열리는 당국 회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냄으로써 명실상부한 8·25 동력으로 진전돼야 한다. 다행히 지금 남북관계의 객관적 환경은 그리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당국 회담 성공의 관건을 쥐고 있는 북한 측 요인이 긍정적이다. 내년 5월로 예정된 이른바 ‘제7차 당 대회 국면’이 북한의 전략과 정책기조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정은은 적어도 당 대회 이전까지는 대외 환경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2013년 3차 핵실험과 그해 12월의 장성택 처형으로 정점에 달한 북·중 관계 악화가 최근 들어 관계 정상화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36년 만에 열리는 당 대회를 승리의 대축전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가 필요하고 이는 결국 남북대화의 지속과 북한의 긴장 고조 자제로 나타날 수 있다. 남북 당국 회담의 성패를 좌우할 북한 측 요인이 그리 부정적이지 않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박근혜 정부도 당국 회담의 성공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중국·미국·일본 등과의 굵직한 양자 외교를 마무리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정책의 밑그림을 어느 정도 그린 상황에서 이제 남북관계의 개선과 관리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과제로 요구되고 있다. 특히 8·25 합의 도출에서 보듯 나름의 원칙을 갖고 한반도의 긴장을 관리하면서 북한을 대화의 장에 나오게 했다는 박 대통령의 자신감도 남북관계 개선의 적극성을 가능케 하는 배경이 될 것이다. 내년 4월로 예정된 총선의 정치적 자산으로도 남북관계 진전은 박근혜 정부에 일정하게 필요할지 모른다.


중국이 남북대화를 방해할 이유도 없다. 미국 역시 ‘전략적 인내’ 입장에는 변화가 없지만 내년 11월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남북대화가 유지돼 한반도 긴장을 관리한다면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다. 내년 상반기까지 남북관계의 대외적 환경은 그리 나쁘지 않은 셈이다.


금강산 관광, 5·24 조치도 논의해야관건은 우호적 대외환경을 활용할 수 있는 우리의 적극적 노력과 전략적 접근이다. 어렵사리 마련된 남북 당국 회담의 기회가 남북관계 개선의 지속적 동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통일대박론과 8·25 국면의 상충성을 해소해야 한다. 지난해부터 박 대통령이 강조하고 있는 통일대박론은 적어도 북한에 흡수통일과 제도통일의 우려로 전달됐다. 대통령의 진정성을 담은 지난해 드레스덴(Dresden)선언마저 북한이 거부하는 속내는 바로 박근혜 정부의 흡수통일 시도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결국 통일대박론의 흐름과 8·25 합의 이후 남북관계 개선의 흐름이 상충하거나 북한에 서로 다른 시그널로 인식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북 당국 회담의 성공을 위해서는 정부가 의제의 포괄성이라는 전향적 입장을 견지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원하는 의제만을 고집하거나 북한이 관심 갖는 의제를 묵살한다면 당국 회담의 진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드레스덴선언 구상이나 3대 통로(민생·환경·문화) 의제들을 논의하면서도 동시에 북한이 시종일관 제안하고 있는 금강산 관광 재개나 5·24 조치 해제도 일단은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지난해부터 북한이 국방위 중대제안과 특별제안을 통해 제의한 정치·군사 어젠다에 대해서도 언제까지 소극적으로 거부할 이유가 없다. 정치·군사 의제를 놓고 우리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북핵 문제와 군사적 도발 문제를 제기하면 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에 역사적 업적을 남길 수 있을지 드디어 시험대에 올라섰다. 당국 회담의 개최가 8·25 국면에서 8·25 동력으로 발전하고 결국은 통일의 초석을 쌓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정부의 국정과제인 ‘평화적 통일기반 구축’은 통일 준비라는 구호가 아니라 향후 당국 회담의 성공에 달려 있다.


김근식 경남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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