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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난데없었던 ‘맥통법’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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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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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지난주 인터넷과 SNS에선 난데없는 ‘맥통법’ 논란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기획재정부가 수입 맥주의 할인판매를 제한하는 제도를 만든다는 게 요지다. 기재부 측이 국내 맥주 업계의 고충을 들은 뒤 ‘국내 맥주시장을 40% 이상 잠식한 수입 맥주’의 가격경쟁을 규제하는 데 힘써 주기로 약속했다는 업계발 뉴스가 발단이 됐다. 이에 비난 여론이 고조되면서 기재부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공식 부인해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런데도 이후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확산되는 이상한 양상을 보였다.

 우선 맥통법이라는 명칭부터 개운치 않은 심기를 드러낸다. 이는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을 말하는 ‘단통법’에 빗댄 말로 ‘○통법’은 확장되는 중이다. 도서정가제는 ‘책통법’, 최근 국회에서 추진 중인 PC방과 스크린골프장 요금 인하 경쟁을 막는 PC방유통구조개선법은 ‘피통법’, 여기에 ‘맥통법’까지 추가된 것이다. 여기서 ‘통’은 통일 가격이라는 의미로, ‘○통법’은 정부 주도 담합법으로도 풀이했다. 소비자들은 정부가 가격에 개입해 소비자가격을 높임으로써 기업의 이윤을 늘려주는 전위대 노릇을 한다며 불만을 쏟아냈고,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정부’라며 비판했다.

 어쨌든 정부는 맥주 가격과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욕만 잔뜩 먹은 셈이다. 왜 일어나지도 않은 해프닝에 소비자들은 이렇게 분노했을까. 이번 일을 보면서 경제 당국과 국내 기업에 대한 우리 소비자들의 신뢰가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간 건 아닌지 찜찜했다. 소비자들이 쏟아낸 각종 비판과 불만 글을 보면 우리 경제 당국과 독과점 기업들이 경쟁 제한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며 소비자만 등치고 있다는 의심이 기저에 깔려 있다.

 소비자들은 변하고 있다. 이미 ‘국산품 애용이 애국’이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났고, 애국심을 미끼로 한 봉노릇은 안 하겠다는 생각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맥주시장만 봐도 지난해 국산 맥주가 전년 대비 4% 성장하는 동안 수입 맥주는 25% 성장했다. 내년엔 수입 맥주가 전체 맥주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거란 전망이다. 소비자들은 국내 시장 잠식을 위기로 보지 않았다. 맥통법 논란에 국내 양대 맥주회사를 향해 “수입 맥주 발목 잡지 말고 맥주나 맛있게 만들라”고 일침을 가한다.

 소비자들은 싸고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선 물건의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시장도 따지지 않는다. 해외직구를 활용하는 데 거침이 없다. ‘광군제’ ‘블랙프라이데이’ 등 다른 나라 쇼핑 행사를 우리 쇼핑 행사처럼 활용한다. 국내 소비자뿐 아니라 외국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한국 물건을 사기 위해 인터넷 직구로 쇼핑하러 온다. 우린 시장에 국경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상품 경쟁도 국내 기업끼리가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과 해야 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경제 당국과 기업이 가격 규제로 시장을 지킬 수 있다는 발상을 한다면 우리 경제의 미래는 암울해진다. 소비자들이 국산 맥주를 외면하는 건 수입 맥주 탓이 아니다. 맥주야말로 규제와 과잉보호 탓에 맛으로 글로벌 경쟁이 안 되는 대표 품목이다. 맥주 역시 규제 철폐와 자유경쟁이 살 길이다. 소비자들이 정부를 향해 “중소업체와 중소 수입업체들의 가격경쟁을 약화시키는 주류법부터 확 뜯어고쳐 시장경쟁을 통해 국산 맥주 품질을 높이도록 하라”고 주문하는 건 그나마 국산품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한국의 기업 규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에서 넷째다. 기업 규제 수준이 OECD 평균 수준만 돼도 우리나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 정도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규제 만능주의는 당국의 편의주의뿐 아니라 일부 기업이 규제에 편승하려는 이기심도 얽히고설켜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일반 소비재도 글로벌시장 경쟁이 벌어지는 시대다. 정부와 기업 모두 규제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할 거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