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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2] "맘에 들면 가난해도 좋다"… 신랑감 정한 옌유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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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외교사절단 대표 자격으로 만찬에 참석한 양광성(왼쪽 두 번째)과 옌유윈(왼쪽 세 번째). 옌유윈의 오른쪽 세번째가 프랑스 주재 대사 구웨이쥔, 1938년 5월, 파리. [사진 김명호]

1923년 가을, 상하이의 유명 출판사에 준수한 광둥(廣東)청년이 입사했다. 나이는 23세. 워낙 말단이다 보니 제대로 된 책 편집에는 끼어들 엄두도 못 냈다. 그림에는 소질이 있었다. 아동도서 편집실에서 온갖 눈치 보며 도안에만 매달렸다. 만드는 책마다 실패했다.

대부호 손녀로 대학 때 차 몰고다녀
장쉐량·구웨이쥔 등 거물과도 친교
첫남편 양광성과 길에서 만나 교제

여직원들 사이에는 인기가 좋았다. 경리 직원은 은행에 갈 때마다 이 청년을 데리고 다녔다. 상하이 여자상업은행 이사회 회장은 애들 책 좋아하는 40대 초반의 과부였다. 우연히 은행에 나왔다가 탐스러운 청년을 발견했다. 먼저 말을 걸었다. 청년은 여인이 들고 있는 책을 보자 얼굴이 빨개졌다. 몇 달 전, 자신이 직접 만든 책이었다.

은행 이사장과 젊은 출판사 직원은 취향이 비슷했다. 같이 차 마시고, 산책도 자주했다. 청년은 화보(畵報)에 관심이 많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여 회장은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다. “자금을 댈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네가 뭘 하건 입도 벙긋 안 하겠다.”

1926년 2월에 첫 선을 보인 양우화보(良友畵報)는 찍기가 무서웠다. 3일만에 초판이 매진되고, 재판·3판도 순식간에 가판대에서 모습을 감췄다. 1945년 10월 정간되기까지 단 한 번도 재고가 남은 적이 없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화보를 멀리했다. 양우화보만은 예외였다. 겨드랑이에 끼고 거리를 활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독자들은 화보의 품격에 만족했다. 화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남녀불문, 가는 곳마다 얘깃거리를 몰고 다녔다. 실린 인물들에 관한 반응도 “실릴만한 사람이 실렸다”며 한결같았다. 옌신허우(嚴信厚·엄신후)의 손녀 옌유윈(嚴幼?·엄유운)과 젊은 외교관 양광성(楊光?·양광생)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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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성(왼쪽 첫째)과 옌유윈이 장스윈(오른쪽 두번째)부부와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1933년 가을, 제네바.

옌유윈은 1919년, 열네 살 때 톈진(天津)의 외국인학교에 입학했다. 4년 후, 집안이 상하이로 이사한 후에도 톈진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교회학교이다 보니 규율이 엄했다. 주말만 되면 엄마가 프랑스 요리사를 데리고 톈진으로 왔다. 2014년 가을, 109세 생일을 앞둔 옌유윈은 당시를 회상했다. “엄마는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움직일 때마다 일꾼 수십명을 몰고 다녔다. 파티라면 빠지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엄마 따라 파티에 간 적이 있었다. 요란한 파티였다. 상석에 앉아 있던 외교부장 구웨이쥔(顧幼鈞·고유균)과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아버지와 친구 사이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구웨이쥔은 그저 그랬고, 장쉐량은 총기가 넘쳐 보였지만, 피차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훗날 나의 좋은 친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어울리고, 애들은 애들끼리 어울렸다. 외교관 장뤼푸(蔣履復·장이복)의 넷째 딸 장스윈(蔣士雲·장사운)도 이날 처음 만났다. 나보다 일곱살 어린 장스윈은 나를 친언니 이상으로 따랐다. 장쉐량이 평생 만난 여인 중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였다는 회고를 남길 정도로 지혜와 애교를 겸한 재원이었다.”

1925년 여름, 상하이의 후장(?江)대학이 여학생 모집 공고를 냈다. 옌유윈은 엄마의 미국유학 권고를 뿌리쳤다. 후장대학 여학생 기숙사는 악명이 높았다. 해만 지면 외출을 금지하고, 남학생 방문은 어느 시간이건 허락하지 않았다. 집에도 한 달에 한 번만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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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시절의 옌유윈이 당시로는 최고급 차량에 올라타 있다. 1929년 11월, 런던. [사진 김명호]

옌유윈은 집에 갈 때마다 부모의 입학 선물인 자동차를 직접 몰았다. “남학생들은 내 이름을 몰랐다. 다들 'Eighty Four'라고 불렀다. 내 차 번호가 84였다. 2년 후, 푸단(復旦)대학으로 전학했다. 유일한 여학생이다 보니 기숙사 입주가 불가능했다. 집에서 학교를 다니니 살 것 같았다. 언니와 오빠들은 모두 영국과 미국에 유학 중이었다.”

당시 상하이의 공원이나 찻집에는 점쟁이들이 죽치고 앉아 있었다. 고객은 남자 친구와 함께 온 젊은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옌유윈도 축구 선수로 명성을 떨치던 남자친구와 함께 손금을 봤다. 점쟁이는 주책바가지 늙은이였다. 옌유윈에게 두 명의 남편이 있을 거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날 이후 건장하고 잘생긴 남자 친구는 옌유윈을 피했다.

엄마에게 하소연했더니 자연스럽게 결혼 얘기가 나왔다. 엄마가 엄숙한 표정부터 짓기에 말을 가로챘다. “다른 건 보지 않겠다. 내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면 가난뱅이라도 좋다. 내 맘에만 드는 사람이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하자 엄마는 의아해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온갖 호사를 다 누린 애다. 돈 없는 사람과는 하루도 못 산다”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옌유윈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옌유윈과 양광성은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토요일 오후, 천천히 차를 몰던 옌유윈은 백미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기를 쓰고 따라오는 청년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차를 세웠더니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지적인 용모에 키가 훤칠하고 당당했다. “네가 누군지 안다. 전부터 한번 만나고 싶었다. 같이 커피를 한 잔 하고 싶어서 달려왔다.“ 온 몸이 땀 투성이였다. 옌유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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