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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덕구의 NEAR 와치

중국, 썩어도 준치와 주제 파악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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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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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지금 세계 주요 국가들은 국가 위상이나 자긍심에 중점을 두고 과거 회상적인 ‘썩어도 준치’적 자세와, 국가 현실과 이해득실을 중시하는 ‘주제 파악’적 자세의 배합에 골몰하고 있는 것 같다. 국내 사정이 어려워도 각국은 썩어도 준치에 더 기울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력·군사력·외교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최대일 뿐 절대적이지는 못하다. 그래도 미국은 아직도 가치동맹의 힘과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며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주력한다. 일본도 노후화된 거함과 같이 무력감에 빠져 있음에도 그 배의 갑판에서는 온갖 파티와 자기과시 행위가 펼쳐지고 있다. 중국을 견제하는 데 미국과 연합하면서 미국으로부터 보통국가화와 군사대국화를 양해받았지만 일본의 국가 부채는 계속 늘어만 가고 국가의 흐름은 축소균형시대를 향하고 있다.

 중국의 고민은 깊어 보인다. 중국은 본격적인 굴기의 시대를 열고 있다.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괄목할 만큼 커지고 영향력 또한 막강해졌다. 세계 최대 규모의 외환보유액과 거대 중국 기업의 힘을 바탕으로 중국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아프리카와 중남미에서 경제적 힘의 외교에 열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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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속마음은 매우 복잡할 것 같다. 지난 30여 년간 중국의 기적을 일궈 낸 중국 공산당의 능력은 2008년 글로벌 위기 이후 전환기를 지나면서 신뢰의 위기에 직면하며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중진국 함정의 기로에서 기존 전략과 매뉴얼로 계속 승부하기에는 여건과 환경이 너무 달라졌고 도처에서 포화상태의 증후군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일 신동맹은 중국을 더욱 긴장시키며 세계 전략을 다시 짜고 굴기에 더욱 매달리게 하는 듯하다. 중국은 서태평양 자유항로가 차단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믿고 있으며,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미·일 연합함대의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 그래서 남중국해 산호초섬 위에 인공섬까지 건설하기에 이르렀고, 일대일로(一帶一路)로 명명된 서진정책(Pivot to the West)이 최상의 선택이며 안전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또한 중국은 미국의 동맹 외교망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과 한국 등 미국의 핵심 우방을 우군으로 만드는 데 주력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영국 방문 모습은 이러한 국제관계의 현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줬다. 그가 영국 여왕과 함께 탄 황금마차, 버킹엄궁의 레드카펫,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의 연설 등 모두가 파격적이고 지극정성의 예우였다. 이번 시 주석의 영국 방문에서 중국은 대규모 투자를 대가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핵심 국가이고 미국의 혈맹인 영국과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전승 70주년 기념 퍼레이드에 참석했고, 중국은 명분과 실리 양면에서 큰 덕을 봤다. 시 주석은 박 대통령이 주도하는 한·일·중 정상회의 개최를 지지하고 북핵 문제에 대한 한·중 공동대응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중국의 경제력과 힘의 외교의 한계를 읽을 수 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영제국의 위엄과 전통을 지키면서도 누구와도 더불어 경제적 실리를 균형 있게 챙기는 데 강하다. 그러나 그들 몸에는 앵글로색슨의 피가 흐르며 정신적·가치적으로는 미국과 한마음이다. 또한 중국이 최근 한국과의 관계 증진만으로 한국과 미국 사이에 수십 년 넘게 가슴과 피로 굳건하게 맺어진 가치동맹·안보동맹 관계를 약화시킬 수는 없다.

 지난 9월 26일 시 주석은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번 영국 방문과 대조되는 방문이었다. 시애틀에서 워싱턴까지 대륙을 횡단하며 중국의 힘을 과시하려는 시진핑의 메시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열렬한 환영 열기 속에 묻혀 버렸다. 시 주석은 워싱턴 방문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묘한 미소와 마주하고 점잖으나 냉랭하고 단호한 어조의 영어를 들어야 했다.

 지금 중국에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 능력에 비해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너무 넓은 지역과 영역에서 너무나 높은 목표와 과업에 매달려 있는 것같이 보인다. 중국은 겉으로 드러내는 과잉 자신감과 숨겨진 마음속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부담스러운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국면에 처해 있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을 극복하고 미래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는 게 중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선 국제적인 신뢰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전환기 관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중국 경제를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자기혁신과 자기절제에 주력해야 할 시점이다. 중국의 배추 포기는 커질 만큼 커졌으니 배춧속을 단단히 채워야 할 때다. 다른 나라에도 마찬가지겠지만 썩어도 준치와 주제 파악 사이에서 중국이 보다 더 주제 파악 쪽에 다가서기를 기대한다. 이 길만이 중국이 확실하고 안정적으로 굴기를 이루는 기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