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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납치산업’ 지능화 … 경찰복 입고 와 “함께 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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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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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한국 교민 사회가 심난하다. 벌써 10명째다. 지난달 31일 홍모(74)씨가 납치 10달 만에 숨진 채 발견되며 필리핀에서 강력 범죄로 희생된 한국인은 10명으로 늘었다. 인터넷 교민 커뮤니티에선 ‘이제 필리핀을 떠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마닐라·민다나오섬이 단골 지역
물색조·납치조·협상조 역할 분담
AK소총 무장 고급리조트 침입도
독일인 2명 몸값으로 64억원 지불
카페 등서 무장 강도 사건도 빈발
“멋 내지 말고 돈자랑 말아야”

 안타까운 사건이 한둘이 아니다. 지난해 3월 3일 유학생 납치·살해 사건이 있었다. 20대 여대생이 마닐라 파사이 지역으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 파사이 지역은 마닐라 국제공항이 위치하고 있어 호텔과 유흥지역이 많은 동네다.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아 탔는데 납치범들이 타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그날 오후 9시 여대생의 친구에게 문자를 해 2억원이 넘는 몸값을 요구했다. 이틀 동안 납치범들은 10여 차례 전화를 걸어 왔다. 간혹 여대생이 아직 살아 있다며 통화도 시켜줬다.

 납치범으로부터 연락이 끊긴 건 사흘 뒤인 3월 5일이었다. 이날 저녁 마닐라 북부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택시가 발견됐다. 택시 밖에 납치범으로 보이는 1명이 총상을 입고 죽어 있었다. 납치범들은 그로부터 5일이 지난 10일 문자메시지로 다시 연락을 해왔다. 여대생은 4월 9일 범인들의 아지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오로지 택시를 잘못 탔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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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에 오래 사는 교민들은 길거리를 다니는 택시는 잘 타지 않는다. 택시 탈 일이 있으면 호텔이나 사무실에서 콜택시를 부른다. 꼭 탈 일이 있으면 모범택시를 이용한다.

 피랍 10개월 만에 질병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홍씨 사건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홍씨는 지난 1월 남부 민다나오섬 잠보앙가 지역에 있는 아들 집을 찾았다가 납치를 당했다. 잠보앙가 지역은 납치 조직인 ‘아부사야프’가 활동하는 술루섬 인근이다. 술루섬은 ‘납치의 수도’로 불린다. 필리핀 언론 ABC의 표현에 따르면 “민다나오에서 일어나는 납치의 끝은 술루섬이다. 이게 패턴”이라고 한다. 홍씨가 억류된 곳도 술루섬이었다.

 아부사야프의 활동 범위는 상상 이상이다. 지난해 4월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사바섬까지 가 중국인 관광객을 납치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해외언론은 필리핀의 납치를 산업(industry)이라 부른다. 지난해 10월 민다나오 남쪽 술루 지역에서 납치됐다 풀려난 독일인 2명은 몸값으로 2억5000만 페소(약 64억원)를 지불했다니 그런 말을 붙일 만하다.

 납치조직은 결코 즉흥적으로 범행을 하지 않는다. 물색조·납치조·운반조·협상조가 따로 있다. 물색조는 부유층에 고용된 가정부나 운전기사 등이다. 필리핀 경찰청에 있는 반납치국(Anti-Kidnapping Group)에서 납치를 예방하기 위한 수칙으로 가정부나 운전기사를 고용할 때 유의하라는 지침을 내린 적도 있다. 이들은 납치 대상이 어느 정도 몸값을 줄 수 있는지, 고정된 동선이 있는지 파악해 알려준다.

 납치조는 총기는 기본이고 경찰복을 입기도 한다. 밤에 AK자동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10여 명이 고급리조트에 들이닥친 적도 있다. 지난달 민다나오섬 인근 사말섬의 고급리조트에서 납치된 캐나다인·노르웨이인들이 그렇게 당했다. 납치를 하면 운반을 전담하는 이들이 따로 있다. 사말섬에서 납치된 캐나다인들은 운반조에 의해 400㎞ 떨어진 술루섬까지 이동했다. 술루섬에 있는 부패정치인과 현지 관료가 납치조직과 협력하기도 한다. 몸값을 받으면 납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몸값을 나눠 가지게 된다.

 길거리를 가다가 경찰인 줄 알고 차를 탔는데 알고 보니 납치범인 경우도 있었다. 40대 한국인 교민 김모씨는 지난 8월 마닐라에서 한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말라테 지역 거리를 혼자 걷고 있다가 무심코 담배를 빼물었다. 경찰복을 입은 필리핀 남성이 나타나 김씨에게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했다”며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김씨는 회색 SUV에 올라탔는데, 경찰이 납치범으로 돌변해 김씨에게서 금품을 빼앗았다. 다행히 김씨는 차량이 신호에 걸려 서 있을 때 탈출에 성공했다.

 지난 2월 마닐라 퀘손시티에서 일어난 40대 여성 박씨의 피살 사건은 강도에 의한 것이었다. 박씨는 커피를 사기 위해 스마트폰과 약간의 현금만 들고 카페를 찾았다 변을 당했다. 카페에는 무장강도가 있었다. 박씨는 스마트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항하다 총을 맞았다. ‘설마’ 총을 쏠까 하는 생각에 몸싸움을 한 게 화근이었다. 2012년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총기살해 사건은 7349건이었다. 인구 10만 명당 8.93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교민 커뮤니티에선 ‘알아서 조심하면 된다’는 의견도 많다. 필리핀 교민들의 조언을 종합하면 이렇다. 외출할 때 최대한 허름하게 입고 다닐 것. 강도를 만나면 순순히 물건을 줘버릴 것. 그리고 결코 돈자랑을 하지 말 것. 납치가 산업인 나라에서 사는 법은 그랬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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