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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있는 삶’에 한 표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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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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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훈
사회부문 기자

막차 시간에 즈음해 버스나 지하철을 자주 탄다. 폭탄주에 붉어진 내 얼굴만큼이나 회식 후 귀가하는 옆자리 직장인들의 볼도 벌겋게 물들어 있다. 목이 꺾여 가며 졸고 있는 젊은 직장인들이 눈에 띈다. ‘내일 또 막차를 타겠지’라는 생각 때문일까. 이들의 얼굴엔 후련함보다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다. 지난봄 출장차 다녀온 네덜란드와는 대비되는 풍경이다. 그곳에선 오후 5~6시면 직장인들이 대부분 회사를 나섰다. 오후 7시를 지나면 도로가 한산해지고 집집마다 불이 켜지면서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술 냄새는 없었다.

 ‘저녁이 있는 삶’. 대학교 동창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주제다. 대선주자였던 손학규 전 의원이 3년 전 내걸었던 슬로건은 언론에서도 이제 일반명사처럼 사용된다. 저녁이 있는 삶만 보장된다면 저출산부터 경기 침체까지 갖가지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는 지난달 정부가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시안을 내놨을 때도 화제가 됐다. 전세 대출 한도 확대부터 지자체 주선 단체 미팅까지 다양한 고육책이 나왔지만 ‘N포세대’로 불리는 젊은 층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같은 한탄도 나왔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는 “하도 야근이 잦아서 제시간에 집에 들어가는 게 어색할 정도”라고 했다. 미혼이지만 평일 데이트는 꿈도 못 꾸고 주말엔 밀린 잠을 자기 바쁘다. 기혼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 아빠들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6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였다. 한 인구 전문가는 “일·가정 양립이 정착되려면 부부가 집에 오래 머무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 논란을 일으킨 ‘9급 공무원 가는 서울대생’도 비슷한 맥락이다. ‘화려한 스펙’에도 하루 종일 업무와 상사에 치이고 일과 후엔 회식이나 야근에 치이는 ‘저녁이 없는 삶’을 벗어나려는 이가 점점 늘어날 거란 의미다. “퇴근하겠습니다.” 이 한마디가 어려워 의미 없는 초과 근무를 하거나 성공과 돈을 추구하기보단 자신만의 행복을 찾겠다는 선택. 쉽지 않겠지만 부럽다는 반응을 주위 친구들에게 많이 들었다.

 나에게도 큰 변화가 생겼다. 처가 가까이 살기 위해 며칠 전 서울 시내에서 수도권 아파트로 이사를 감행했다. 출퇴근에만 4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떨어져 살던 한 살배기 아들을 매일 볼 수 있으니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젊은 층부터라도 다음 선거 때 저녁이 있는 삶에 한 표 던지면 어떨까. 정치인들 중 누군가는 나의 퇴근길과 내 가족의 행복을 손톱만큼이라도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정종훈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