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스무살 죠바니가 두 명의 한국인 아빠를 가진 사연

미주중앙

입력

<b>[보석상의 보석이야기] 스무살 죠바니의 아빠는 두 명의 한국인 </b>

내가 호텔 로비에서 리셉셔니스트로 일하는 그 애를 알게 된 것은 콜롬비아에 갈 때 늘 묵었던 대형 호텔에서 방이 20개 정도 되는 자그마한 부티크 호텔로 옮기면서 부터다. 죠바니(GIOVANNI)는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야간에는 호텔에서 일하는 갓 스물 넘은 대학생이다.

내가 늦은 시간 호텔에 도착했던 날 그는 책상 하나 달랑 놓인 텅 빈 로비에서 무언가에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밤늦어 피곤할 시간인데도 밝고 상냥하게 맞아주는 그 덕분에 하루 종일 비행기에 시달려 떡이 된 몸과 마음이 위로가 되었다.

나는 콜롬비아 호텔에서 체크 인 체크 아웃 할 때는 되도록 영어를 사용한다. 내가 스패니시로 말을 걸면 그들은 나보다 유창한 스패니시로 없던 수수료를 잘도 만들어 내게 들이밀기 때문이다. 이런 바가지 상혼은 대형호텔이나 소형호텔이나 마찬가지고 단골 손님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일종의 문화와 같다. 외국인에게는 일종의 웰컴 패키지인 셈이다.

내가 영어로 대화를 시작하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국 사람이지요?"하고 묻더니 더듬거리며 한국말을 시작했다.
“저 조금 한국말 해요. 안녕하세요. 저 이름은 죠바니입니다. 해리 김씨죠?”
23년 넘게 콜롬비아를 다니면서 그 애처럼 한국말을 문장으로 구사하는 콜롬비아인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내 친구 올란도, 에르네스토도 한국어 단어 몇 개 쓰는게 전부인데.

내가 죠바니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것은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늦은 시간 호텔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가 있는 작은 데스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죠바니가 “세뇰 킴”하며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곤 이런저런 안부를 물으며 자기 얘기를 털어놓았다.

죠바니는 콜롬비아 엄마와 한국인 아빠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이다. 그는 다섯살 때까지 부모와 동생과 함께 살았는데 다섯살 생일이 지나고 얼마 후부터 아빠가 보이지 않았고 그 후로는 아빠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 자신이 기억하는 아빠가 친아빠가 아니라 동생의 친부라는 사실을 엄마로부터 듣게 되었다고 한다.

본인의 친부는 스패니시를 배우기 위해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이었는데, 엄마와 사랑에 빠졌다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자 두려운 마음에 학교도 마치지 않고 한국으로 줄행랑 쳤고 그 후론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친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성은 박씨고 스패니시 이름으로 죠바니라 불렀다는 것 뿐이며 본인 이름도 아빠의 이름을 따서 죠바니가 되었단다. 엄마는 죠바니를 낳은 후에 동생의 친부이며 죠바니가 생부로 알고 따랐던 또다른 한국인을 만나 동생을 낳고 몇 년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의 아픈 과거사를 들으며 궁금해졌다.
“왜 너의 엄마는 한국 남자로부터 한번 큰 상처를 받았는데 또 다른 한국 남자를 만나게 된 걸까?”
죠바니도 그 점이 궁금해 엄마에게 물었는데, 엄마의 대답은 “그래도 사는 동안 내가 사랑받고 살았다고 느낀 상대는 이 두 명의 코레아노였다” 는 것이었단다.

남미는 낙태를 금기시하는 가톨릭 문화와 개방적인 성문화 그리고 남미 남자들의 가정에 대한 무책임으로 매년 수많은 싱글맘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엄마는 같아도 아빠가 다른 가정들이 많다. 그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가난을 대물림 받고 그들 부모와 똑같은 삶을 이어간다.

죠바니의 가정사를 들으며 내가 콜롬비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 오버랩 되었다. 당시 나는 현지 언어가 안되어 스패니시를 구사하는 한국인 유학생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친해졌다. 그 학생 역시 사귀던 현지 여학생이 임신을 하게 되어 어린 나이에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고 괴로워했다. 그도 얼마 안 있어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 후론 소식이 끊어졌다.

죠바니는 오늘도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한다. 한국어를 좀 더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면 자신과 가족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릴 계획이다. 만에 하나 자신의 생부나 동생의 생부가 동영상을 보고 가족을 찾아 주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그리고 시간과 여유가 된다면 아빠의 나라 한국을 꼭 한번 가고 싶단다. 아빠 나이가 되고 보니 그때 아빠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 자기를 버리고 한국으로 떠난 아빠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지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울 뿐.

보석상식23. 다이아몬드는 언제부터 결혼 반지에 사용되었을까?

다이아몬드는 수십억년 전 지구의 지각 깊숙한 마그마 속에서 탄소에 막대한 열과 압력이 가해져 생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는 땅속 깊이 130 킬로미터 아래에 매장되어 있으며 땅 위에서 발견되는 다이아몬드는 화산 분출시 화산과 함께 땅 위로 솟아오른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99.95% 이상이 탄소(C) 하나의 단일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머지 0.05% 미량의 불순물이 색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령 미량의 질소가 함유되어 있으면 노란 빛을 띠게 되고 붕소가 함유되어 있다면 파란 빛을 띠게 됩니다.

다이아몬드 1캐럿을 얻기 위해서는 평균 250톤의 자갈과 바위를 캐야 할만큼 채취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류가 채취한 다이아몬드의 양은 겨우 500톤 정도에 불과 합니다. 그리고 500톤 중에서 보석으로 가공되는 양은 약 20%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여성의 전유물로 되다시피 한 다이아몬드도 예전에는 희소성 때문에 남자, 특히 왕이나 일부 귀족들이 독점한 보석으로 여성들에게는 착용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다 15세기경 프랑스의 왕 샤를레아가 그의 정부 아그네솔에게 핑크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면서부터 여성들도 다이아몬드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결혼반지로 쓰이게 된 것은 1477년 오스트리아의 맥시밀리언 대공이 프랑스 버건디 왕국의 공주에게 청혼할 때 사랑의 약속으로 주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HARRY KIM(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