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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뉴스 인 뉴스 <285> 도박과 오락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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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최근 중견 기업인들이 중국 마카오와 베트남·캄보디아 호텔 카지노에서 원정도박을 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습니다.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의 간판급 선수들도 마카오에서 도박을 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국내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같은 도박으로 수백억원을 탕진했다고 한다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불법 도박과 친목·여흥 목적의 오락 사이의 알쏭달쏭한 경계에 대해 알아봅니다.

국내 조폭이 운영 마카오 정킷방, 보증금 50억~100억원

◆국내 6개 폭력조직 ‘정킷방’ 운영=검찰과 경찰이 이번에 적발한 건 국내 조직폭력배(조폭)들이 중국 마카오와 동남아 일대 호텔 카지노의 VIP룸을 빌려 운영해온 ‘정킷방’이란 이름의 신종 원정도박이다. 원래 정킷(Junket)이란 말은 카지노 측에서 고객들에게 항공편과 호텔 숙식을 제공하는 방식의 공짜 도박여행을 의미하는 카지노 업계 전문용어다. 해외 카지노의 마케팅 기법을 국내 조폭들이 도박 사업에 활용한 것이다.

 검·경에 따르면 국내 양대 세력인 범서방파(김태촌)와 양은이파(조양은) 계열의 6개 폭력조직이 최근 수년 동안 중국 마카오와 필리핀·베트남·캄보디아에서 정킷방을 운영해왔다. 아시아 최대 카지노 도시인 마카오에는 범서방파 계열의 광주 송정리파와 서울 학동파가 함께 진출했다. 베트남(전남 영광파), 필리핀(청주 파라다이스파), 캄보디아(영산포파·영등포 중앙파)에서도 국내 조폭들이 정킷방을 운영해왔다고 한다. 방식은 이렇다. 조폭들은 해외 카지노 측에 50억~100억원의 보증금을 내고 VIP룸 운영권을 따낸다. 이 안에서 게임을 하는 고객이 1회 베팅할 때마다 베팅액의 1.24%의 수수료를 떼거나 고객이 잃은 돈의 40%를 카지노에서 받는다.

 고객으로는 기업인 재력가나 프로야구선수, 연예인 등 고소득 전문직이 집중 공략 대상이 됐다. 서울 강남 등지의 고급 룸살롱에서 입소문을 내거나 재력가들과 가까운 중간 브로커를 통해 고객을 모집하는 수법도 썼다. 검찰은 이들 조폭 조직이 최근 2~3년 새 정킷방 영업으로 수백억원의 불법수익을 거둔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이 현재까지 적발한 기업인 7명은 적게는 20억원에서 최대 200억원을 조폭들이 운영하는 정킷방에서 탕진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이 수사 중인 삼성라이온즈 소속 프로야구 선수 3명도 지난해 프로야구 시즌이 끝난 뒤 마카오 카지노 정킷방에서 10억원 이상을 잃었다고 한다. 조폭들은 고객들이 정킷방에서 잃은 돈을 장부에 기록한 뒤 국내에 돌아와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며 공갈협박도 일삼았다.

 ◆칩 빌려 도박 후 귀국해 정산=문제는 해외 카지노 도박이 현지에서는 합법이라고 해도 내국인이 거액의 도박을 하면 국내 불법 ‘하우스 도박’ ‘인터넷 도박’과 마찬가지로 처벌받는다는 점이다. 또 정킷방 영업은 고객들이 카지노 측에서 칩을 빌려 도박을 한 뒤 국내에 돌아와 정산하는 방식(‘환치기’)으로 이뤄진다.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까지 적용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2004년 미국 라스베이거스 미라지호텔 카지노에서 35만 9000달러의 칩을 빌려 도박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지방의원 김모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상습도박과 외환관리법위반 모두 유죄로 판단했다.

 우선 도박 혐의에 대해선 “우리 형법은 대한민국 영역 외에서 죄를 범한 내국인에게도 적용되는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며 “예외적으로 내국인 출입을 허용하는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에 따른 카지노에 출입한 것은 법령에 의한 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되지만 도박죄를 처벌하지 않는 외국 카지노에서 도박했다는 사정만으로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또 “카지노에서 ‘칩’은 현금 대신 사용되는 증표로 호텔 측에서 칩을 교부받은 것은 금전의 대차로 외환관리법상 처벌대상인 허가받지 않은 자본거래 행위”라고 밝혔습니다.

 이 같은 대법원 판례는 한국인의 카지노 도박은 전 세계에서 강원도 정선의 강원랜드 카지노에서만 허용된다는 의미다.

 실제 귀금속업자인 김모(62)씨는 2003년부터 4년 동안 강원랜드에서 평생 모은 재산 500억원을 날릴 때까지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는 거꾸로 강원랜드 측이 도박중독자의 출입제한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200억원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7년 간의 소송 끝에 김씨가 돌려받은 돈은 5억 8000만원에 불과했다.

 ◆판돈 2만 8000원 유죄, 61만원 무죄=강원랜드 이외의 도박장에서 도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명절날 친족 간 고스톱 같은 도박행위가 처벌되는 건 아니다. 도박죄에 관한 형법 246조 1항은 ‘도박을 한 사람은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일시오락 정도에 불과한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고 돼 있다.

 대법원은 불법 도박과 일시 오락의 구분을 위해선 ▶판돈의 규모와 횟수 ▶도박 시간과 장소 ▶도박자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 ▶함께 도박한 사람의 친분 관계 ▶이익금의 용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판돈 액수나 도박 방식은 규정돼 있지 않아 헷갈리긴 마찬가지다. 특히 판돈 액수가 아주 적더라도 피고인의 재산이나 소득수준에 비춰 상대적인 도박성을 따지는 추세다.

 2006년 7월 40대 여성 오모씨는 지인의 집에서 점당 100원씩 1시간 20분 동안 고스톱을 쳤다. 전체 판돈은 2만 8700원에 불과했다. 1심은 오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2007년 7월 인천지법 항소부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월세 10만원짜리 집에서 정부보조금으로 생활하는 오씨의 경제사정에 비춰 판돈이 결코 작지 않다”며 벌금 3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50대 일용노동자인 한모씨와 아파트 관리원 주모씨도 지난해 12월 말 거제시 한 다방에서 11만 9000원을 놓고 카드게임 ‘훌라’를 한 혐의로 기소돼 창원지법 통영지원에서 각각 벌금 30만원형을 선고받았다. “판돈이 적지 않고 도박 장소가 다방이며 피고인들의 아내 중 한 사람이 신고한 점 등에 비춰 피고인들의 도박을 일회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유죄 이유다.

 반면 광주지법은 2012년 7월 현직 지방의원 두 명을 포함한 50대 남성 4명이 전남 담양에서 61만 4000원으로 ‘세븐’ 포커게임을 한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한 뒤 저녁 술값 마련을 위해 포커게임을 했고 사회적 지위에 비춰 판돈 규모도 다액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울산지법도 올해 6월 대기업 노조위원장 등 5명이 판돈 41만원 상당의 카드 게임 ‘훌라’를 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과거 회사 동료들로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고 판돈도 수입과 재산에 비해 적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내기 골프·바둑도 지나치면 도박”=대검찰청에 따르면 도박·상습도박 혐의자는 2004년 3만 9431명에서 2009년 6만 4823명까지 급증했다가 2014년 2만 5915명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정식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944명(3.6%)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기소유예나 벌금형에 약식기소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기업인들과 프로야구선수, 연예인 등의 원정 도박 사건이 잇따르면서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도박 행위의 요건인 우연성이 아니라 기량에 따른 실력차로 승패가 좌우될 수 있는 스포츠 게임에서 도를 넘어 내기를 한 경우에도 불법 도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농업에 종사하는 선모씨와 자영업자 김모씨 등 4명은 2002년 12월부터 2년 6개월간 제주도 등지에서 30여 차례 내기 골프를 쳤다. 실력차에 따라 ‘핸디캡’을 정한 뒤 매 홀마다 1타당 최대 100만원씩 이긴 사람에게 주고, 전반 9홀 500만원 후반 18홀 1000만원을 최소타 우승자에게 별도 상금으로 주는 방식이었다. 전체 판돈만 6억~8억여원에 달했다.

 이들의 내기 골프에 대해 2005년 1심인 서울남부지법(이정렬 판사)은 “화투, 카드, 카지노처럼 도박은 승패의 결정적 부분이 우연에 좌우돼야 하는데, 운동경기는 경기자의 기능과 기량이 승패를 결정하기 때문에 골프는 도박이 아니다”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2006년 항소심에 이어 2008년 대법원도 유죄로 판단했다.

 유죄 판단의 근거는 “내기 골프가 기량의 차이가 있는 운동경기라도 핸디캡의 조정과 같은 방식으로 우연의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어 도박에 해당한다” “내기 골프를 방임할 경우 경제에 관한 도덕적 기초가 허물어질 위험이 있다”는 거였다.

 이에 앞서 대법원은 2003년 9월 하청업체 대표들과 1타당 최고 40만원씩 걸고 10여 차례에 걸쳐 10억원대의 내기 골프를 한 혐의로 기소된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에 대해서도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확정했다.

 내기 바둑과 당구도 지나치면 도박이 될 수 있다. 1997년 4월 당시 서울지검 북부지청은 95년 9월 30일 일본 오이타현의 한 온천여관에서 한 판에 최대 5억원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둔 혐의로 유통업체 대표 김모씨를 구속하고, 유명 학원장 정모씨를 불구속입건했다. 바둑실력 아마 2~3급 수준인 정씨는 당시 하룻밤 새 김씨에게 66억원을 잃었다. 내기 바둑에서도 골프의 핸드캡처럼 ‘치수(置數) 조정’(실력이 낮은 하수에게 미리 몇 점을 깔고 두게 하거나 마지막에 덤 몇 집을 주는 방식)을 통해 우연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도박이 될 수 있다는 게 법원의 판례다. 서울고등법원은 비슷한 이유로 1975년 4월 친구와 내기 당구를 친 피고인에게 벌금 1만원을 선고했다.

정효식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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