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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만 돌렸다 하면 삼시세끼 먹방·쿡방 … 손님도 식당도 ‘피로사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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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호 10면

먹방·쿡방의 홍수다. 채널마다 음식과 맛집을 소개하면서 방송을 탄 식당 중엔 ‘방송 후유증’을 호소하는 곳도 생겼다. 영업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진은 ‘맛있는 녀석들’, ‘백종원의 3대 천왕’, ‘찾아라! 맛있는 TV’, ‘테이스티 로드’, ‘수요미식회’의 방송 장면. [중앙포토]

‘수요미식회’ ‘집밥 백선생’(tvN), ‘백종원의 3대 천왕’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사하셨어요?’(SBS), ‘테이스티 로드’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비법’(올리브TV), ‘식신로드’(K스타), ‘찾아라! 맛있는 TV’(MBC), ‘냉장고를 부탁해’(JTBC), ‘맛있는 녀석들’(코메디TV)….


 현재 지상파와 종편·케이블에서 방영 중인 먹방·쿡방들이다. 대충 꼽아봐도 손가락이 모자란다. ‘VJ특공대’(KBS), ‘파워매거진’(MBC), ‘생활의 달인’(SBS) 등 화제와 정보를 다루는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음식과 식당이 중심을 차지한 지 오래다. 장르를 막론하고 맛이 장악한 방송에서 누군가 먹거나 요리하거나 맛집을 찾아다니는 장면을 피할 도리가 없다.


 물론 최근의 다양한 음식 프로그램들은 음식과 식재료를 담론으로 끌고 왔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는다. 하지만 전성시대라는 말로 충분치 않은 열풍은 만만치 않은 부작용도 불러왔다.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이 오히려 맛집에 악영향을 미쳐 식당도 괴롭고 손님도 괴로운 상황들이 생겨난 것이다. 

서울 서교동에 있는 ‘올드 크로와상 팩토리’ 문에는 원치 않는 방송 출연이 영업에 미친 영향을 토로한 주인의 메모가 붙어 있다.

몰카에 소개된 작은 빵집, 손님 몰려 휴업 #서울 서교동에 있는 빵집 ‘올드 크로와상 팩토리(이하 올크팩)’는 지난 6일부터 일주일 넘게 가게 문을 닫았다. 굳게 닫힌 문에는 발길을 돌리는 손님들에게 남긴 메모가 붙어 있었다.


 ‘저희는 맛집으로 오실 만한 가게의 규모도 아니고, 홍대 뒷골목의 작은 크로와상(크루아상) 집입니다. 매일 오후 되면 그냥 돌아가시는 분들에게 죄송하고, 이젠 못 오시는 단골손님에게도 죄송해하며…’.


 1년을 못 채우고 문 닫는 곳이 부지기수인 홍대 앞에서 5년째 영업 중인 이곳이 예정에 없던 휴업을 한 건 방송 때문이었다. 올크팩은 8월 말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손님처럼 방문한 뒤 몰래 촬영한 방송국은 ‘남녀노소 좋아하는 빵 맛집’으로 이곳을 소개했다. 주인인 양윤실씨는 “지인들을 통해 방송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올크팩은 몸살을 앓았다. 영업 시작 전부터 줄이 늘어섰고, 크루아상은 한 시간 만에 품절됐다. 방송을 보고 멀리서 찾아온 손님 중엔 영업이 끝났는데도 문을 두드리고, “직원을 써서 빵을 더 만들어라”며 훈수를 두고, 빵이 떨어졌다고 욕을 하는 이도 있었다. 양씨는 혼자 빵을 만든다. “일본의 작은 가게를 롤모델로 삼아 동경해 왔다”며 직접 만들고 소량 판매하는 것이 원칙이라 했다. 그런데 감당할 수 없는 손님이 밀려들고 자신만의 방식에 왈가왈부하는 이들마저 생기자 양씨는 앓아누웠다. 그는 “돈만 내면 물건을 내놔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 영업 방식을 쉽게 질타하는 손님들에게 실망하면서 가게를 접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다.


 #‘냉장고를 부탁해’ 등 방송에 출연하며 대세로 떠오른 이연복 셰프의 중식당 ‘목란’은 11월 말까지 예약이 꽉 차 있다. ‘전화를 200통 걸어서 예약에 성공했다’는 무용담이 돌고 예약 경쟁을 뚫는 법을 소개하는 블로그가 있을 만큼 요즘 가장 뜨거운 맛집이다. 손님이 몰려드니 떼돈을 벌었을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목란’은 코스요리를 먹는 단골 중심으로 운영되던 식당이었다. 하지만 방송으로 유명해지면서 탕수육·짜장면·짬뽕 등 단품 식사요리만 주문하는 손님이 대거 늘었다. 전화가 쇄도하고, 주차장이 미어터지는데도 이 셰프가 “객단가(고객 1인당 평균 구매가격)가 떨어져 매상이 줄었다”고 털어놓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그는 한 방송에서 “월 매출액이 1억원 정도 됐는데, 현재는 2000만원 떨어진 8000만원”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다행히 ‘목란’의 경우 방송 후유증에서 곧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셰프는 “한참 기다려 예약을 했으니 제대로 먹어보자고 생각하는 손님이 늘면서 지금은 되레 매출이 높아졌다”고 했다. 그러나 업계에선 오래전부터 화교 요리계의 거물로 꼽히던 이연복 셰프의 식당이기에 견뎌낸 것이라고 말한다. 웬만한 식당은 득(得)만큼이나 실(失)이 적지 않은 방송 후폭풍을 감당하기가쉽지 않다는 것이다.


손님 몰리면 대박 난 줄 알고 월세 올려흔히 방송에 소개된 식당들은 “대박 났다”는 부러움을 사곤 한다. 실제 솜씨는 좋은데 위치가 나빠 고전하다 방송 출연 후 기사회생한 곳도 있다. 요식업계 관계자들은 이런 식의 대박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식당의 지속 가능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방송을 보고 찾아온 손님은 다시 그 식당을 찾는 일이 거의 없는 데다 ‘뜨내기손님’이 늘면 단골은 떨어져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연복 셰프가 언급한 객단가 하락이 발생한다. 이익과 직접 관련된 문제라 식당의 존폐가 좌우될 수도 있다.


 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방송에 소개된 뒤 속앓이를 하고 있다. 손님이 들이닥치지만 수익은 확 줄었기 때문이다. 방송을 보고 찾아온 손님들은 샐러드·파스타 같은 단품 메뉴를 주로 주문했다. 와인을 곁들여 여러 요리를 먹던 단골손님들은 예약 경쟁을 뚫지 못했다. 와인 매출이 줄면서 이익은 줄었는데 직원들의 노동량은 급증했다. 간혹 예약에 성공해 식사를 마친 단골들은 분위기와 서비스가 달라졌다며 실망했다. 방송 효과가 사라진 뒤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영업자이기도 한 이들은 속사정을 모르는 건물주의 눈치도 보게 된다고 했다. ‘올크팩’의 양윤실씨는 “손님들이 줄을 서면 돈을 굉장히 많이 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건물주 입장에선 월세를 올려달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연복 셰프 역시 방송에서 여러 차례 “월세가 또 올랐다”는 말을 꺼냈다.


 손님들도 불만이다. 방송에 등장한 후 줄이 늘어서는 한 식당의 포털사이트 평가란엔 각종 불평·불만이 올라와 있다. “왜 유명한지 모르겠다” “납득이 안 되는 맛이다” “불친절하고 교만한 식당”이라는 악평뿐 아니라 “싸가지가 없다” “반드시 망하길 바란다” 같은 악플도 눈에 띈다. 방송 등장 전부터 식당을 찾던 단골도 불만족스럽긴 마찬가지다. 손님이 많아져 맛이 변했다고 실망하고, 단골집을 잃었다며 아쉬워한다. 재미있다고 방송을 보는 시청자만큼 “프로그램이 폐지됐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은 이유다.


 방송에 소개된 뒤 음식과 서비스 질이 낮아지는 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셰프들도 있다. 퓨전 한식레스토랑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는 “식당이 너무 바빠지고 사람이 몰리게 되면 음식을 잘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한식 파인다이닝 ‘권숙수’의 권우중 셰프 역시 “음식 장사는 마라톤 같아서 체력을 안배하지 않으면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없다”며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손님 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8월 말 한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나온 이태원의 만두집 ‘쟈니덤플링’은 손님이 몰리자 임시 휴업을 택했다. 레스토랑 평가지 ‘저갯 서베이(Zagat Survey)’ 등에 소개된 이곳은 원래 손님이 줄지어 서던 식당이다. 매장 세 개를 운영하면서 늘어나는 손님을 감당하는 나름의 노하우도 있지만 급하게 만두 물량을 대는 대신 1, 2호점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우아한 식사 여유 없는 대리 만족”이 같은 문제를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권우중 셰프는 “방송 프로그램이 오히려 식문화를 단순화하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맛에 대한 취향은 주관적인 것인데, 방송이 제한된 정보를 갖고 ‘최고 맛있다’고 단정해 버리면 다양한 미식 경험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장 셰프로도 활동했던 김혜준 인천문예전문학교 제과제빵학 교수는 “문화의 저변을 넓혀가는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싸고 맛있다’는 사실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올바른 매너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가이드라인도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셰프는 “사람들이 음식을 즐기는 미식이 아니라 먹는 행위 자체에 몰두하는 탐식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질적·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지면서 사람들이 맛집을 찾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그 때문인지 방송에 나가려면 1만원 안팎의 메뉴를 만들라고 한다”는 말도 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이와 비슷한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지난 6월 ‘푸드쇼 대열풍(The food-show craze)’이라는 기사를 통해 한국의 먹방 열풍을 보도하면서 그 원인이 경기 침체로 인한 한국인의 불안과 불행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요리 자체보다 재미에 치중하는 방송이 우아하게 식사할 여유가 없는 한국인에게 대리만족과 눈요기를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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