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도 장관도 역학조사관 늘린다더니, 내년 예산 0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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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 후속 대책의 하나인 역학조사관 확충이 내년 예산안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인력 확충안을 제출했지만 행정자치부가 “협의가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결정을 미뤘기 때문이다. 메르스 확산의 주된 원인으로 ‘초기 대응 실패’가 지적돼 정부가 전문인력 보강을 약속했지만 흐지부지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복지부가 제출한 인력 확충안
행자부 “협의 더 필요” 결정 미뤄
“국회서 법안 통과 넉 달 됐는데 …
이달 내로 규모 정해 예산 짜야”

 역학조사관 증원은 메르스 사태가 한창이었던 지난 7월부터 추진됐다. 국회는 정규직 공무원으로 역학조사관을 충원하는 방안을 담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도 지난달 역학조사인력 강화 등 48개의 중점 과제를 담은 ‘국가방역체계 개편 방안’을 확정했다. 당시 정진엽 복지부 장관은 “방역체계의 근간인 우수한 역학조사관을 확보해 안심 방역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복지부는 인력 충원 계획을 행자부에 건넸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용익 의원에 따르면 복지부의 희망 충원 인력은 75명이다. 비정규직 역학조사인력의 정규직 전환이 40명, 신규 역학조사관 선발이 35명이다. 현재는 질병관리본부 소속의 역학조사 직원 42명 가운데 2명만 정규직이다. 나머지는 비정규직이거나 군 복무 중인 공중보건의다. 공중보건의는 대부분 1~3년 일하다 떠나기 때문에 역학조사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진다. 지난 5월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평택성모병원에도 공중보건의가 투입돼 역학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비정규직 조사관들도 잠시 머물다 연구소나 대학으로 간다.

 하지만 복지부와 행자부의 협의가 두 달 넘게 이어지면서 인력 충원과 이에 필요한 예산 확보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행자부가 증원 여부를 결정해야 해당 인력에 대한 인건비를 기획재정부와 협의할 수 있지만 첫 단계도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행자부는 질병관리본부의 차관급 격상 등 정부조직법 개정과 연계돼 있어 결정이 늦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행자부 관계자는 “인력 충원 논의를 계속하고 있지만 언제 결론이 날지는 말하기 어렵다. 예산이 따로 책정되지 않아도 증원 결정만 나면 복지부 예비비로 신규 인력을 채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의 설명은 다르다. 복지부 관계자는 “행자부가 결정을 빨리 내게끔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복지부 관계자는 “예비비도 결국 기재부에 추가로 신청해서 받아야 한다. 그사이 시간은 계속 흐른다”고 덧붙였다. 국회예산정책처는 내년도 예산안 분석 보고서에서 “감염병 확산 대응체계 구축을 위해 이른 시일 내에 역학조사관을 충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정부가 메르스 사태를 벌써 잊은 것 같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울대 의대 김윤(의료관리학) 교수는 “역학조사관 확충부터 엇박자를 낸다면 앞으로 방역 개편 전반이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고 꼬집었다. 김용익 의원은 “역학조사관 확충 법안이 통과된 지 4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정부가 늑장을 부리고 있다. 이달 내로 역학조사관 규모를 확정하고 필요한 예산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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