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노래 부르는 다섯 살 한국 아이의 미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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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31면

집 근처에 식당이 하나 있다. 여기를 지나갈 때마다 ‘돈존’이란 이름이 어떤 의미일까 무척 궁금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뜻을 알게 됐다. 돼지를 뜻하는 한자 ‘돈(豚)’ 에다 공간을 뜻하는 영어 ‘zone’을 결합한 조어였다. '아! 삼겹살 파는 식당이구나'하고 깨닫는 순간 흥분이 됐다. 마치 10여 년 전 한국어를 처음 배우면서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될 때마다 기뻤던 그 느낌이었다. 그 시절 한글로 쓴 ‘셀프 서비스’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단어들은 솔직히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퓨전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아무거나 같이 혼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 흔해졌기 때문이다. ‘삼겹살을 파는 곳’이란 의미를 가진 ‘돈존’이란 식당 이름도 그래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러시아인인 나에게 한자와 영어를 뒤섞어 쓰는 단어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나는 ‘돈존’이란 간판을 보면서 한국이 처한 묘한 경제상황을 연상해본다. 내가 ‘셀프 서비스’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고민하던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에 미국처럼 중요한 경제 파트너는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 중국은 미국보다 큰 한국의 제1 수출대상국이 됐다. 이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미국은 한국경제의 중심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돈존’같은 특이한 식당 이름이 등장한 것 같다.


중국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깊게 침투해 들어왔는지는 생활 속에서 확인된다. 저녁 늦게 동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 든 아이가 엄마·아빠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네다섯 살쯤 되는 그 여자아이는 ‘예예(??·할아버지)’와 ‘나이나이(??·할머니)’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들어간 중국어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고 나는 많이 놀랐다.


영어 유치원에 이어 한국에 중국어 유치원도 생겼다고 들었다. 눈 앞에서 중국어 노래를 부르는 어린 아이를 직접 보니 느낌이 많이 달랐다. 초등학교에도 가기 전부터 중국어를 공부하는 아이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중국어와 영어를 같이 사용해 조화롭게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까. 아니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까. 좀 단순화하면 영어와 중국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의 미래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될 지도 모른다.


마침 이 글을 쓰는 동안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타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이 주도해온 TPP는 중국을 포함하지 않았다. 한국도 그동안 가입을 망설여왔다. 하지만 이 협정은 한국 경제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이 참여하면 중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알 수는 없다. 결국 ‘豚’(중국)이냐, ‘zone’(미국)이냐, 아니면 ‘돈존’(미국+중국)이 가능할 것인가. 한국이 직면한 아주 어려운 문제다.


이리나 코르군한국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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