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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북한은 쉽게 망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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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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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UCSD) 석좌교수

지난 30년간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 중에서 하나 두드러진 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1980년대 남유럽에서 시작된 민주화의 물결은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로 퍼져나갔다. 또한 이 물결은 소련·동유럽권의 붕괴를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더욱 민주주의적인 통치를 진전시켰다. 하지만 민주화의 물결은 최고조에 이른 뒤 정체 상태다. 우리는 쓰라린 교훈을 얻었다. 독재·권위주의 정권은 놀라울 정도로 생명력이 있다. 독재자들의 생존 비법은 무엇일까.

 표준적인 해석은 독재체제가 1차적으로 억압과 폭력을 통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례를 살펴보면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권위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이념, 민족주의, 물질적인 보상, 부정 선거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조선노동당 창립 70주년을 맞아 김정은이 열병식에서 한 연설을 살펴보면 그는 적어도 당분간은 권력을 유지하게 해줄 새로운 통치 방식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서구 매체의 보도는 김정은의 허풍과 겉만 번지르르한 수사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식의 제목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김정은은 어떠한 위협에도 맞설 것이다’ ‘북한은 미 제국주의와 전쟁할 준비가 돼 있다’ 등등. 물론 김정은의 연설에는 북한군에 대한 경의의 표시가 포함됐다. 또 노동당이 살아남은 것은 군과 보안기관 덕분이라는 것도 확실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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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김정은의 신년사들과 비교해 보면 변화가 감지된다. 이번 연설은 당과 인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수십 번 반복된다. 당은 인민에게 봉사하며, 당과 인민은 뗄 수 없는 사이며, 당은 인민을 믿는다는 것이다. 한번은 놀랍게도 당이 인민에게 책임을 져야 하며, 인민이 당을 따르는 이유는 당이 인민에게 뭔가를 주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서구식 민주주의에 거의 근접한 발언이다.

 인민과 관련된 연설 부분은 군사력 유지에 대한 발언 다음에 나온 게 아니라 그 앞에 배치됐다. 오로지 군을 강조하는 데 연설의 우선순위를 설정하지도 않았다. 국가안보에 대한 부분에서 그는 군과 인민이 모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무력을 키우기 위해 인민의 복지후생을 저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군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김정은은 젊은이 문제로 방향을 바꿨다. 연설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 주제였다. 어떤 면에서는 이 대목이 연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청년층이라는 한 세대를 겨냥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젊은이들을 향해 자신도 마찬가지로 젊은이이며 젊은이가 미래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 대목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당에 대한 청년의 의무뿐 아니라 당 또한 청년의 미래에 대한 의무가 있다는 게 강조된 것이다. 김정은은 사실상 젊은이를 북한 대전략(大戰略)의 3대 축 중 하나로 격상시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당은 앞으로도 인민중시, 군대중시, 청년중시의 3대 전략을 제일 가는 무기로 틀어쥐고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힘차게 매진할 것이며 조선혁명을 끝까지 완수할 것입니다.”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위험한 편견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다. 북한 체제처럼 이상하고 독특하고 왜곡된 체제는 틀림없이 취약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눈앞에서 수많은 권위주의 정권의 존재를 보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심지어 국민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이제 김정은이 과연 북한 정권 내부에서 권력을 확고히 했느냐 하는 문제만 따져서는 안 될 시점에 왔다. 그가 앞으로 포퓰리즘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북한의 포퓰리즘 전략은 세 가지로 구성될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평양의 엘리트를 위해 끊임없이 투자하는 것이다. 아파트·놀이공원·소비재뿐 아니라 심지어 사치품 공급까지 확대하는 일이다. 둘째, 경제 활동에 대한 통제를 점진적으로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이다. 소규모 시장 활동을 허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경제 엘리트를 부상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 구식 민족주의가 아니라 테크놀로지를 강조하는 전향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이다. 젊은 평양 시민이 북한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열병식에서 삶의 질 향상에 대해 자신에게 대고 직접 말하는 것 같은 젊은 지도자를 지켜봤다면 김정은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다.

 김정은이 그가 약속한 것을 북한 주민에게 줄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있긴 하다. 여기에 대한 답은 중국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번에 김정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가. 바로 중국의 권력 서열 5위인 류윈산(劉雲山)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다. 만약 북한 정권이 조금이라도 개혁을 실험하면서 자본가의 활동을 허용하며 그들의 투자 능력을 키워준다면, 또 평양의 엘리트와 젊은이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게다가 중국이 대북 무역·투자를 확대한다면? 슬프게도 북한 체제의 종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참 더 늦춰질지도 모른다.

스테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