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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 63% “교과서 아닌 EBS로 공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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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역사 교과서요? EBS나 외워야죠.”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한 수험생의 말이다.

역사 교과서 이참에 제대로
올바른 교과서도 중요하지만
수능만 위한 암기교육 바꿔야

 본지가 14일 종로학원·하늘교육에 의뢰해 올해 수능에서 한국사 시험을 선택한 수험생 692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63.4%(439명)가 “한국사는 EBS 교재로 공부한다”고 답했다. 교과서를 본다는 학생은 28.8%(199명)에 그쳤다. 사실상 수험생의 ‘역사 교과서’는 EBS 교재라는 뜻이다.

 온 나라가 역사 교과서를 놓고 둘로 나뉘어 싸우 지만 학생들에겐 ‘불편한 암기과목’일 뿐이다. 수능과 70% 이상 연계되는 EBS 교재만 달달 외 우는 게 교실의 현실이다.

 이날 오후 찾아간 서울의 한 자율형사립고. 교실 뒤편 사물함 위엔 학생들이 버린 ‘보지 않는 교과서’들이 쌓여 있었다. 고3 학생들의 책상엔 교과서 대신 EBS 교재가 놓여 있었다. 김모(18)군은 “국사 교과서는 거의 안 본다”며 “서울대가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면서 상위권만 한국사를 공부한다. 외울 게 많고 등급받기 어려운 ‘헬(hell·지옥) 과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김모군도 “EBS 교재는 내용이 너무 압축돼 있어 이해도 안 되 지만 나만 틀릴까 봐 지도도 외울 때까지 본다”고 했다.

  역사 교과서를 제대로 만드는 일 못지않게 어떻게 가르칠지도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역사 교과서를 놓고 싸우고 있는 프레임이 잘못됐다”며 “ 학생들에게 ‘세상에 눈을 뜨게 한다’는 역사의 본질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도 “논쟁의 수렁에 빠진 교육 패러다임을 바꾸는 게 먼저”라며 “통일시대에 대비하고 세계를 선도하는 관점을 심어 주는 교과서를 만들고, 그에 맞는 교육방식을 찾아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이번 논란에서 보수와 진보진영이 내세운 교육 관련 논리는 단 한 가지다. “국정화가 돼야” 또는 “검정제를 유지해야” 수능이 쉬워진다는 것이다. 모두 주입식 역사 교육방식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교과서의 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더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교육계는 교육의 본질이 빠진 채 진보와 보수가 사활을 걸고 벌이는 싸움에 대해 “교과서를 다루는 가장 비교육적 논쟁”이라고 입을 모았다. 조왕호 대일고 교사는 “정치권이 정파에 유리한 내용을 교과서에 담아 이를 인정받으려 한다”며 “올바른 교과서가 나오더라도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우리역사교육연구회장인 이두형 양정고 교사도 “역사 교육의 목표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통합을 꾀하는 ‘역사 역량’을 기르는 것인데 교과서가 오히려 분열과 이념의 전쟁터가 됐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준봉·백성호·성시윤·김호정·강태화·윤석만·노진호·백민경 기자
뉴욕·워싱턴·런던=이상렬·채병건·고정애 특파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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