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아나운서의 생명은 '바른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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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라는 직업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만나는 이미지는 뜻밖에도 거친 평원을 달리는 외로운 한 사나이다.

마라톤 전투의 승전 소식을 아테네에 전하고 마침내 숨을 거둔 그리스 병사에게는 멀고 험한 길을 줄기차게 달린 강인한 체력과 함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도달해야 할 값진 사명감이 있었다. 만약 아나운서 박물관이 생긴다면 뜰 한 쪽에 그의 조각상을 전시하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나운서의 요람은 라디오다. 라디오가 매체의 주류이던 시절에 아나운서는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는 '배달부'였다. 반가운 소식, 궂은 소식을 빠르고 정확하게 전해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갑오경장 시절에 라디오가 있었다면 단발령도 아나운서가 처음 전해 주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현대사의 전환점에는 반드시 아나운서의 긴장된 목소리가 있었다. 세상이 바뀌는 걸 대중이 실감하도록 해 준 공로의 일부는 분명 아나운서의 몫이다.

라디오 시대의 아나운서에게 폭넓은 교양과 낭랑한 음성이 중요한 자격 요건이었다면 TV시대의 도래는 그 둘에 한 가지 요소를 더 추가하게 된다. 이른바 반듯한 외양이다.

청취자가 시청자로 바뀐 건 소설의 독자가 영화의 관객으로 달라진 사태와 유사하다. 상상으로 그려낸 이미지가 현실의 '얼굴'과 마주치면서 아나운서는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맞게 된다.

방송 초창기에는 PD, 작가의 영역을 아우르는 멀티미디어형 아나운서가 요구됐지만 방송 직종이 점차 세분화하면서 아나운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기자가 취재해 정리한 원고를 읽어주는 뉴스 전달자로서 아나운서의 미덕은 '또박또박'이었으나 점차 그 틀에서 벗어나 시청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온 아나운서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현재 아나운서의 명함을 가진 방송인들이 하는 일들은 실로 다양하다. 뉴스 앵커에서부터 교양. 오락 프로그램의 사회자, 스포츠 캐스터, 우리말 지킴이, 심지어 드라마에서 연기를 한 아나운서도 있다.

KBS 2TV에서 일요일 낮에 방송하는 '쇼 행운열차'의 김현욱 아나운서는 개그우먼 김지선과 함께 '연변 늬우스'를 진행하는데 그 익살이 개그맨 못지 않다.

크로스오버는 문화물결의 큰 흐름이다. 직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결단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아나운서의 순수(?) 영역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 영토를 개발 확장할 것인가. 아나운서들이 함께 모여서 안건을 투표에 부칠 성질의 일이 아니다.

아나운서 각자가 자신의 능력과 가치관에 따라서 스스로 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다만 기본기를 충분히 닦은 후에 개인기를 선보이는 게 정도(正道)다. 재미와 품격은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다. 아나운서의 개성과 전문성은 말의 묘미로 인해 빛이 나고 마침내 보석이 된다.

최종 판정은 결국 시청자가 내린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원칙, 아나운서는 언어운사(言語運士)라는 고전적 정의를 피해갈 도리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언어세계는 거친 말과 거짓말이 나뒹구는 추악한 싸움터가 되고 있다. 아나운서는 짓밟힌 말의 순정을 회복하는 데 앞장서라. 고운 말, 곧은 말 되살리는 목표를 향해 마라토너의 심정으로 호흡을 가다듬어라.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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