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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강남 디스카운트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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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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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가자고 해도 안 가요. 거긴 나쁜 사람들 사는 동네잖아요.”

 얼마 전 택시를 타고 압구정동에 가자고 했더니 젊은 택시 기사가 “혹시 그 아파트 단지로 가는 건 아니죠”라고 물으며 꺼낸 말이었다. 행선지가 다른 곳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실제론 승차거부 의사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낯선 타인, 그것도 자기 택시를 탄 고객을 향해 거주지 정보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무차별적 증오에 깜짝 놀랐다.

 비슷한 시기, 이번엔 압구정동에서 택시를 탔다가 한 번 더 놀란 적이 있다. 택시 기사는 나를 태우자마자 혼잣말일 수 없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권 잡으면 강남 놈들 재산 싹 몰수해 버릴 텐데.” 대꾸 없이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강남 사람들에 대한 영문 모를 분노를 쉬지 않고 내뱉었다.

 운이 나빠 두어 번 문제 있는 택시 기사와 맞닥뜨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꺼림칙한 생각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해 압구정동 S아파트 한 주민의 폭언에 격분해 경비원이 분신 사망한 사건의 후유증 탓인지 소위 ‘강남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부자에 대한 증오가 도를 넘은 것 같아서 말이다.

 강남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늘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질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2030 세대가 소개팅할 때 연애 상대를 결정짓는 주요 지표로 상대의 강남 거주 여부를 꼽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을 정도로 지금까지는 ‘강남 프리미엄’이 더 우세했다. 졸부라며 경멸하는 마음 한편으로는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부러움이 분명 존재했고, 이런 긍정적인 브랜드 가치가 더 크게 작용해 왔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달 초 신연희 강남구청장이 박원순 서울시장과 대립각을 세우느라 꺼낸 ‘강남특별자치구’ 한마디에 “강남을 고립시켜야 한다”는 리치 포비아(부자 혐오) 현상까지 빚어지는 걸 보면서 앞으로는 ‘강남 프리미엄’이 아니라 거꾸로 ‘강남 디스카운트’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강남 주민이 아니라면 ‘강남 프리미엄’이든 ‘강남 디스카운트’든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뚜렷한 이유도 없이 특정 지역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차별적 증오를 발산하고, 그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는 건 분명 문제다.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강남구민 전체를 욕먹게 한 신 구청장의 신중치 못한 정치적 판단만큼 이런 우리 사회의 퇴행도 아쉽기만 하다.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