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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클로즈 업] 청와대 4개월 문재인 민정수석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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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 6개월째. 바다도 없고 친구도 없는 타향살이가 여전히 모래알처럼 서걱거린다. 명색이 변호사인데도 문재인(文在寅)은 골프를 칠 줄 모른다. 골프채를 잡아본 적도 없다.

유일한 취미는 산과 들에 핀 야생화를 감상하는 일이다. 한국의 들꽃에 관한 한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타향살이가 시작된 뒤로는 그나마도 쉽지 않다. 얼마 전 부산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남쪽에는 없는 '처녀치마'(들꽃 이름)가 여기엔 많더라. 한번 올라오면 같이 보러가자"고 했지만 언제쯤 지켜질 약속인지 기약이 없다.

최근엔 이를 여섯 대나 뽑았다. "평소 좋지 않던 것을 뽑았을 뿐"이라고 했지만, 주변에선 격무에 시달린 탓으로 해석한다.

그는 전형적인 동네 아저씨 스타일이다. 지난해 말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노무현 당선자가 전화를 했다. "부부동반으로 밥이나 먹읍시다. 올라오시죠."'순진하게도' 정말 밥만 먹는 자린 줄 알았다고 한다. 두 부부가 마주 앉았다. "나좀 도와줘야겠습니다." 얼마 후 그의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난 9일 만났다. 인터뷰는 한시간 넘게 진행됐다.

-청와대 생활이 벌써 넉달인데.

"참 힘들다. 그동안은 밑그림을 그린 기간이었는데 당장 가시적인 것을 바라는 목소리가 많다. 성급하게 해결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부담이다. 과거 정권들은 6개월 정도 봐주는 기간이 있었는데 참여정부는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섭섭하다. 물론 맷집을 강하게 한 측면도 있다. 비판을 때로는 받아들이고, 때로는 극복하고, 때로는 의연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준 보약이 됐다."

-부인도 덩달아 마음 고생을 할 것 같다.

"민정수석 취임 직후 집사람에게 '내가 이 자리에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지만, 재임 중에는 백화점에도 가지 말아달라'고 요구해 약속받았다. 집사람이 약속을 지켜주고 있어 고맙다. 우린 학창시절에 사귀다 결혼한 사이다. 연애 시절에 집사람은 내가 데모꾼이라 평생 밥벌어 먹기도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변호사라도 하면서 먹고 살 줄은 꿈에도 상상못했을 거다(그는 부인의 이름조차 밝히길 꺼렸다)."

-대통령은 문수석에게 무얼 주문하나.

"자리를 맡기면서 첫째 국정원.검찰.경찰.국세청 등 권력기구들을 개혁하고, 둘째로 고위공직자나 대통령 친인척들의 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하셨다. 지금도 여전히 같은 주문을 한다."

-'왕수석'이라는 평가가 있다.

"군림한다, 권력을 휘두른다는 뜻인 것 같은데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일 많이 하면 왕수석인가.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고 특정인이 나서는 인치(人治)라는 비판일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시스템이다. 청와대는 각 부처 업무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들이 감당하지 못할 때는 청와대가 나선다. 화물연대 사태만 해도 총리 주재 관계장관회의에서 대응방안이 결정됐다."

-공직사회가 '코드'에 얽매여 헤맨다는 지적이 있는데.

"나는 '코드'나 '로드맵' 같은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편하니까 사용하는 것 같은데, 코드란 결코 개인적이거나 감성적인 의미가 아니다. 참여정부의 방향과 철학을 공감하느냐는 것을 코드로 표현하는 것 같다. 내각에서 코드를 공유하지 않는 장관은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새 시스템에 아직 적응 안된 장관이나 공직자들이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요즘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다. '못해 먹겠다'는 얘기도 나왔다.

"대통령은 세상의 비판에 상처받을 분이 아니다. 인생 역정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세상이 뭐라 하든 자기 고집대로 하는 분이다. 그렇지만 대통령께서 호의를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비판에 대해서는 상당히 가슴 아파하고 있다. 주변 인물들이 자신으로 인해 공격받고 사생활까지 훼손되는데 인간적으로 아픔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보고 있기가 애처로울 정도다."

-대통령의 형(건평씨) 부동산문제로 시끄러웠는데.

"대단히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 비판이나 의혹 제기는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고 합리적 근거 아래 해야 한다. 솔직히 나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확인된 부분을 가린 채 계속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나 하는 '역(逆)의혹'도 느끼고 있다."

-청와대에서 '강한 정부'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안다.

"강한 정부와 강한 대통령에 공감한다. 소탈하면서도 강한 대통령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공권력과 경찰력에 의존해선 안된다. '등신' 소리까지 들었지만...대통령의 권위는 인정하고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나. 아직도 대선 후유증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이 된 후 달라진 것이 있는가.

"과거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많은 고려를 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나. 추구하려는 방향은 변한 게 없다. 지난번 방미외교를 가지고 말들이 있는데, 외교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약자다. 저쪽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상태다. 현실을 인식하지 않고 너무 단선적으로 생각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민정수석실은 사정 담당이다. 사정활동 계획은.

"사정은 5년 내내 꾸준히 진행한다. 정치인은 민정수석실의 사정대상이 아니다. 관련 첩보가 나오면 그대로 수사기관에 이첩한다. 사실 막상 (사정을)해보니 기획사정을 할 필요조차 없더라. 제대로 눈만 뜨고 있어도 과거보다 훨씬 많은 실적이 나올 거다."

-내년 총선 때 부산.경남에서 신당 바람을 일으키려면 문수석이 출마해야 한다는 '문재인 징발설'이 있다.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여러모로 (대통령에게)선을 그어 놓았기 때문에 대통령께서 출마를 요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같은 생활을 하는 것도 나 스스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거다. 그만큼 버겁다. 정치적 행보엔 추호도 관심이 없다."

이수호 기자
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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