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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와 선택의 길 위에서 본 아빠의 눈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꿈을 찾는 일곱 번째 숙제
다음의 질문들로 주변 어른 5명을 인터뷰하세요.
①당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은? ②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은? ③제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꿈을 요리하는 마법카페<7> 선택을 선택하기

지난 이야기 초등학교 5학년 나디아는 우연히 ‘꿈꾸는 지구’ 라는 카페에 들어가 ‘꿈 부자’ 주인 언니를 만난다. 꿈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제안에 디아는 매일 언니가 내 준 숙제를 하고 신기한 음식을 먹고 언니가 알려준 ‘마법의 주문’ 덕분에 같은 반 남학생 정혁이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는다. 한편 ‘스무 살에 세계일주를 떠나겠다’는 목표를 약속하고 카페를 나서는 길에 우연히 아빠와 마주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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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혜승(떠다니는 섬)

“디아야!”

키츠와 함께 골목길을 빠져나와 큰길로 막 나온 시점이었다. 내가 학원에 안 간 걸 알고 쫓아오신 걸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떡하지? 키츠는 ‘야옹~’하더니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럴 땐 먼저 선수 치는 방법밖에 없다.

“아빠가 웬일이세요? 지금 일하실 시간 아니에요?”

아빠의 표정이 무거웠다. 그러고 보니 지난 몇 주간 아빠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지난 몇 년간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주말에 거실 쇼파에 누워 초점 없는 눈으로 TV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일주일간 멈추지 않는 비 때문일까. 머리가 축축 처지고 안경이 뿌옇게 된 아빠는 나를 향해 휘청휘청 걸어왔다.

“우리 디아 저녁 안 먹었지? 배고플 텐데 어디 가서 뭐 좀 먹자꾸나.”

우리는 우체국 옆에 있는 자그마한 식당에 들어갔다. 허름한 식당에는 달리 메뉴가 없었고, 아빠 또래로 보이는 마른 아저씨가 파를 썰고 있었다.

“사장님, 이 가게에는 어떤 것이 맛있나요? 딸이랑 오랫만에 외식인데….”

아빠를 곁눈질로 본 아저씨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비도 오고 이런 날에는 울적한 마음을 풀어주는 얼큰한 나가사키 짬뽕이 제격이죠.”

“네, 그럼 그거 두 개 주세요.”

아저씨는 파를 마저 송송 썰고 면을 삶고 하더니 금세 뚝딱뚝딱 두 그릇을 내왔다. 짬뽕이라고 했는데 하얀색이었다. 막 그릭요거트를 먹은 참이라 배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김이 솟는 나가사키 짬뽕을 보자 갑자기 위 속의 거지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중국집 짬뽕의 매운맛과는 다른 칼칼하고 담백한 얼큰한 국물과 함께 각종 해물과 돼지고기를 씹는 맛도 일품이었다. 허겁지겁 먹다 문득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도 좀 드세요.”

“아니다…. 디아가 많이 먹으렴. 아빤 술 한 잔 마셔도 될까?”

아빠는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아빠의 눈은 마치 뭔가를 숨기려는 듯 했다. 마치 내가 매일 학원 대신 꿈꾸는 지구 카페에 갔다 오는 것처럼.

“아빠 무슨 일 있죠?”

“…”

“무슨 일이에요?”

“우리 디아가 눈치가 빠르구나…. 결론부터 얘기를 하면 아빠가 회사를 더 이상 못 다니게 되었어….”

“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아빠가 곧 다른 일자리를 찾을 테니까.”

“엄마도 알아요?”

“아직….”

소주를 계속 들이키는 아빠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나는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이렇게 디아랑 둘이 짬뽕 먹으니 예전에 너희 엄마랑 데이트하던 시절 생각이 나네. 상상이 안되겠지만 너희 엄마는 수줍음 많던 문학소녀였어.”

“엄마가요?”

“응.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줄까? 아빠는 대학가에서 잘나가던 밴드의 보컬이었단다. 엄마는 내 공연에 종종 찾아오던 팬이었는데 우리가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도시락을 싸들고 반지하 작업실로 종종 찾아왔어. 공연비를 받은 날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하니 짬뽕을 먹고 싶다고 했지. 네 엄마는 짜장면도, 볶음밥도 아닌 짬뽕을 그렇게 좋아했어.”

“우와~.”

“그 다음날, 네 엄마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시를 써서 편지에 건넸고 난 시에 멜로디를 붙였어. 그 노래를 불러주던 날,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단다.”

첫, 키, 스? 왜 하필 이 순간 문정혁이 떠오르는 거지?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그 녀석이 기타를 치며 노래 불러주고…. 으악~ 안 돼…. 그런 거 상상하면 안 돼!

“그날 이렇게 비가 와서 너희 엄마를 집에 바래다 주는데 집 앞에서 너희 외할머니에게 딱 걸린 거야.”

“으악… 호랑이 외할머니가 뭐라고 했어요?”

“그날 이후로 네 엄마가 연락이 안되더니 1주일 후에 울면서 찾아왔어. 장모님께서 내가 가난한 음악가라서 싫다고. 딸 고생시키는 거 원치 않는다고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하셨지.”

“할머니 너무하시다….”

“뭐, 사실 장모님이 걱정할 만도 했지.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 무명 가수였으니…. 그래서 나는 가수의 꿈을 일단 접고 취직을 하기로 했어. 밴드 멤버들은 배신자라고 나를 손가락질 했고 팬들도 안타까워 했어.”

“…”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음악이야 언제든지 돈을 많이 벌고 나면 다시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음악 외엔 아는 게 없던지라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일 저 일 전전하다 이 직장에 취직한지 어느새 15년이 되었네….”

“아빠 짬뽕 다 식어요. 좀 드세요.”

“그래…. 내가 딸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돈도 많이 벌고, 디아랑 여행도 많이 다니는 멋진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아빠가 창피하구나.”

“아빠는 지금도 멋져요….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 아빠잖아요!”

아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빠의 어깨가 조그맣게 들썩였다.

“아빠…. 우는 거예요?”

“아…아니야, 디아야. 그냥 짬뽕이 너무 얼큰해서…. 그러니까 디아야…. 아빠는 참 열심히 살았어. 꿈도 포기하고, 취미나 저녁시간, 주말도 포기하고 몸 바쳐 일했어. 계속되는 야근과 회식, 상사와 고객의 횡포에도 묵묵히 참으며 일하면 우리 가족이 행복해질줄 알았어. 그런데 돈을 많이 벌기는 커녕 나만 늙어버렸더구나. 우리 사랑스러운 디아가 이렇게 훌쩍 커버린 것도 모르고…. 네 엄마는 나만 보면 친구 남편들과 비교하며 잔소리를 하고….”

아빠는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이렇게 건강까지 축내가며 회사에 쏟아 부은 노력을 차라리 음악에 쏟을 걸 그랬어. 계속 음악을 했던 밴드 친구들은 히트곡을 여럿 내서 저작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고 교수님 소리 들으며 제자들 키우며 사는데….”

“…”

“청춘을 바친 직장에서 이렇게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버려지다니…. 누군가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착각이었어. 결국 내 삶에 가장 관심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었던 거야…. 수동적인 선택이든 능동적인 선택이든 그 결과에 책임질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아빠…. 취하신 것 같은데 짬뽕 국물 좀 드세요.”

“그래 디아야. 사람이 어차피 한 끼에 한 그릇밖에 못 먹잖아? 그러니까 디아 너만큼은 매끼 진수성찬을 먹으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매순간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라는 말이야…. 아빠는 아무거나 주어지는 대로 먹고 살았지만….”

아빠는 짬뽕 국물을 후르르 들이키는 듯 하더니 그릇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엎드려 꺼이꺼이 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가 해준 너무 많은 이야기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아빠도 예전엔 젊었고, 꿈이 있었다는 것. 그런데 꿈 부자 언니가 말해준 ‘꿈이 가난한 사람’의 ‘생각의 순서’를 따랐다는 것. 어느덧 집에 도착했고 현관문이 열리자 엄마가 팔짱을 낀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웬일이야? 둘이서 같이 들어오고?”

“간만에 둘이 데이트 좀 했어. 당신 표정이 왜 그래?”

“늦었는데 둘 다 안 들어와서 걱정했잖아. 그나저나 디아야. 지나 엄마한테 전화가 왔는데 문정혁이 누구니?”

갑자기 머리에 피가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입술이 덜덜 떨린다.

“그, 그냥, 우, 우리 반 남자앤데….”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나 정리해고 당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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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지구 레시피 ⑦

울적한 마음을 얼큰하게 달래주는 나가사키 짬뽕 재료 오징어 1/2마리, 홍합살·새우살 각각 4개, 바지락 1줌, 양파 1/2개, 호박 1/5개, 버섯 1줌, 당근 1/5개, 청양고추 2개, 대파 1/4뿌리, 달걀 1개, 물(육수) 4컵, 우동사리 2인분. 양념: 다진마늘 1, 굴소스 2, 간장 1, 청주 1, 소금, 후춧가루 약간 만드는 법 1 양파·당근·호박·버섯은 먹기 좋게 썰고 고추·대파는 총총 썬다. 2 달군 팬에 기름을 두르고 해물과 청주를 넣어 볶은 후 물 4컵(가능하면 해물이나 멸치 다시마 육수)을 붓는다. 3 물이 끓으면 야채를 넣고 양념을 넣어 간을 한다. 4 팔팔 끓으면 달걀을 풀어 원을 그리며 부은 후 청양고추·대파를 넣고 살짝 끓인다. 5 익힌 우동사리 또는 칼국수면에 짬뽕국물을 끼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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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작가이자 여행가. 기업인, 콘텐트 제작자로도 활동 중이며 80여 개국을 여행한 꿈쟁이이자 사랑쟁이. 한때 중학교도 자퇴한 문제아였으나 꿈이 생긴 후 독학으로 공부해 최초로 골든벨을 울렸고, 연세대에 진학했다. 암 수술 후 ‘해외에서 커리어 쌓기’ ‘부모님 집 지어드리기’ ‘다큐 제작’ ‘킬리만자로 & 에베레스트 등반’ 등 73개의 꿈 목록을 만들고 지난 10년간 61개의 꿈에 도전했다. 저서로는 『멈추지마 다시 꿈부터 써봐』 『드림레시피』 『당신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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