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광고도 시장조사도 안 해, 경영학 교과서가 답은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기사 이미지

패션계에서 스타트업 성공 신화를 일군 마이클 셸러 아크네 스튜디오 회장. [사진 아크네 스튜디오]

청바지 한 벌로 시작해 세계 최고 패션 무대인 프랑스 파리 컬렉션까지 진출한 패션 브랜드가 있다. 디자인을 맡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정식으로 디자인을 배운 적이 없고, 경영 책임자는 이곳이 사실상 생애 첫 직장이었다. 전통적인 패션 강국 출신도 아니고, 든든한 규모의 내수 시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성공을 거둔 주인공은 스웨덴 패션기업 아크네 스튜디오다.

[해외 CEO 인터뷰] 스웨덴 패션기업 ‘아크네 스튜디오’ 셸러 회장

청바지 한 벌로 시작, 파리 컬렉션 진출
패션 아웃사이더여서 선택의 자유
만들고 싶은 것 만드니 시장이 호응

서울에 세계 38번째 매장 오픈
수요 예측 않고 매력적 도시에 개점
다양성 중시, 매장마다 인테리어 달라

 아크네 스튜디오는 요즘 가장 뜨거운 브랜드 중 하나다. 오는 7일까지 열리는 파리 패션위크에서 샤넬·에르메스·루이뷔통 등 명품 브랜드와 나란히 내년도 봄·여름 컬렉션을 선보인다. 선택된, 소수의 브랜드만이 오를 수 있는 무대에 ‘신생’ 패션기업이 초대를 받은 것이다. 올해로 3년째다.

 아크네 스튜디오를 창업한 조니 요한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마이클 셸러 회장은 열정과 남다른 아이디어를 기회로 만들었다. 아크네 스튜디오는 일반 광고를 하지 않는다. 1년에 두 차례 고급 문화 잡지를 발간한다. 세계 38개 매장은 인테리어와 모양을 서로 다르게 꾸몄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이 모든 매장의 인테리어를 완전히 통일시키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매장을 여는 기준은 셸러 회장과 요한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도시인지 여부다. 아크네 스튜디오는 지난달 18일 서울 청담동에 국내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이를 위해 방한한 셸러 회장을 만나 아크네 스튜디오가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성공한 비결을 물었다. 답은 ‘비정형이 빚어낸 창조적 아이디어’에 있었다. 얽매일 틀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열정적으로, 때로는 남들과 거꾸로 가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사 이미지

아크네 스튜디오의 모태가 된 청바지(사진 위 왼쪽). 2012년 무용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사진 위 오른쪽)가 홍보잡지 커버를 장식했다. 최근 서울 청담동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사진 아크네 스튜디오]

 - 서울에 38번째 매장을 열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시장조사를 해서 수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매장을 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와 조니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도시여야 한다.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일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흥미를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 또 열정을 갖고 어떤 일을 하면 대개는 결과가 좋게 나온다. 한국은 디자인과 문화,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를 사로잡았다. ”

 - 전통적인 경영학 이론을 거스르는 이유는.

 “경영학에서는 시장 분석을 강조하고, 사업을 단계별로 나누고 투자 대비 수익률을 따져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시장을 분석해 그중 일부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을 짜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만들고 싶은 제품을 먼저 만들고 본다. 열정을 지속적으로 키워 나가다 보면 꽃이 피듯 성과가 나타난다. ‘그건 불가능해’라는 말을 늘 듣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행히도 우리 두 사람이 회사 지분 대부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매장마다 생김새가 다 다른데.

 “서울 매장은 아크네 스튜디오를 위해 건물 자체를 신축한, 아주 특별한 매장이다. 건축가 소피 힉스가 화려하지 않지만 기능성이 뛰어난 스칸디나비아 감성을 서울에 이식했다. 밖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지만 안은 조용한 스웨덴 숲 같다. 우리는 다양성이 자산이라고 믿는다. 매장마다 다른 색깔을 내되 전체적으로 뜻이 통하고 감성적으로 연결되면 된다. 도시마다 매장이 다르면 고객들이 다른 도시 매장을 방문할 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아크네 스튜디오는 1996년 스톡홀름에서 청년 4명이 십시일반으로 1만 유로(약 1300만원)를 모아 창업했다. 시작은 패션기업이 아니었다. 광고·영상·디자인·그래픽 등을 제작하고 컨설팅하는 ‘문화 창작 집단’으로 설립됐다. 아크네(ACNE)는 ‘새로운 표현법을 창조하려는 야망’(Ambition to Create Novel Expression)이라는 뜻이다. 요한손은 뮤지션의 꿈을 키우며 무명 밴드 생활을 하다가 합류했다. 이듬해 그가 재미로 만든 청바지 100벌을 주변 친구들에게 선물한 게 입소문을 타면서 패션 회사로 탈바꿈했다. 올해 매출액은 약 1억5000만 유로(약 1970억원)로 예상한다. 아크네 스튜디오는 ‘무심한 듯 멋스러운’ 스타일로 이름났다. 두툼한 재질의 맨투맨 티셔츠와 가죽 재킷, 청바지, 앵클 부츠 같은 스트리트 웨어를 고급스럽게 풀어내는 컨템퍼러리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 문화와 스타일을 함께 판다는 브랜드 이미지가 강한데.

 “요즘 소비자들은 서로 안 어울릴 것 같은 아이템을 섞는 절충주의를 좋아한다. 과거엔 명품을 사는 사람들은 명품만 사고, 중저가 브랜드를 입는 사람은 그런 가격대에서만 옷을 샀다. 지금은 다르다.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아크네 재킷을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다. 옷에 붙은 로고만 보는 게 아니라 제품에서 창조적인 가치를 찾는다. 이런 소비자의 변화와 맞물려 길거리 캐주얼과 고급스러운 프레타포르테(기성복)를 결합한 아이디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2001년에는 거의 파산 지경이었다.

 “창의성은 남달랐지만 제조와 현금 흐름에 문제가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면 창의성을 발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은행이나 투자자에게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구조를 짰다. 여러 가지 벌여놓은 일들을 정리하고 제품·패키지·매장, 이 세 가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조니를 제외한 다른 창업자들의 지분을 인수해 공동 오너가 됐다.”

 - 광고 회사로 출발했는데 정작 광고는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맞다. 자기모순적이다. 전통적인 광고와는 거리를 두고, 창의적인 프로젝트와 제품에 집중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브랜드와 비전에 대한 포토그래픽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가장 최근에는 조니의 11살 아들 프라스를 모델로 세웠다.”

 - 스웨덴은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패션의 역사가 깊지 않은데.

 "우리도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급 맞춤복에서 영감을 얻는다. 이 바닥에서 우리는 아웃사이더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을 만들고 원하는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단점은 그들만큼 잘하고 있다는 걸 끊임없이 증명하고 매일매일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협업할 수 있는 아틀리에(공방)가 스웨덴에는 없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아틀리에가 돼야 했다.”

 -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조언한다면.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는 이유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지 마라. 신참이라는 것은 굉장한 자산이다. 성공은 위대한 제품과 브랜드에서 시작한다.”

 셸러 회장은 불꽃놀이 사업과 고등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친 경력을 갖고 있다. 2001년 스톡홀름 경제대학원을 졸업한 뒤 아크네 스튜디오에 합류했다.

 - 심리학이 경영에 도움을 주나.

 “심리학, 특히 사회심리학은 아주 흥미로운 분야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타인과 어떻게 교류하는가, 왜 그런 행동을 하나’ 같은 궁금증을 설명해 준다. 회사를 한창 키우면서 직원들을 채용할 때 심리학을 배운 게 도움이 많이 됐다. 우리 인사담당 임원은 부부 문제 상담전문가 출신이다.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는 것처럼 복잡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코치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직의 인사 문제를 잘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 졸업 후 아크네 스튜디오에 합류한 계기는.

 “나도 골드먼삭스나 매킨지 같은 큰 회사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동기들이 전부 그쪽으로 가더라. 다들 가는 쪽으로 가면 존재감이 없다. 그 대신 나만의 고유한 관점을 갖고 남과 다른 것을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말고,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면 된다.”

박현영·신도희 기자 hypark@joongang.co.kr

[S BOX] ‘스톡홀름 신드롬’ 인질극 무대였던 은행에 매장 열어

1973년 8월 23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노르말름스토리에 있는 크레디트반켄 은행에 무장 괴한이 들이닥쳤다. 은행 직원을 인질로 잡고 6일간 경찰과 대치했 다. 그 사이 인질들은 묘하게도 범인들에게 정서적으로 밀착되는 현상을 보였다. 경찰의 제안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풀려난 뒤 오히려 범인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거나 유리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 범죄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닐스 베예로트는 인질들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고 표현했다. 인질들이 범인에게 동조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현상을 일컫는 심리학 용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같은 이름의 TV 개그 프로그램 덕분에 요즘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용어이기도 하다.

 40여 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인질극의 무대였던 은행 자리에는 스웨덴 패션기업 아크네 스튜디오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들어서 있다. 아크네 스튜디오의 세계 38개 매장 중 가장 큰 매장이다. 당시 범인이 인질들을 잡고 있던 장소에는 옷을 입어보는 피팅룸이 마련돼 있다. 2008년 패션잡지 보그는 아크네 스튜디오를 소개하면서 “또 다른 스톡홀름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꾸미지 않은 듯, 꾸민 것 같은 ‘뉴 럭셔리’ 브랜드에 소비자들이 열광하며 감성적 유대감을 갖는다는 의미다. 심리학에 조예가 깊은 마이클 셸러 회장의 의중이 반영된 걸까. 그는 “그 공간이 마냥 좋았다. 그래서 그냥 매장을 열었다”고 말했다. 열정이 이끄는 브랜드 아크네 스튜디오의 수장다운 답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