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며칠 새 무너진 베를린 장벽 통일은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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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동독박물관(위)과 내부에 전시 중인 동독 국민차 트라반트. [사진 동독박물관]

다음달 3일은 독일 통일 25주년이 되는 날이다. 동독(DDR·독일민주공화국)이 서독(BRD·독일연방공화국)에 합쳐진 지 사반세기가 지났다. 그 사이 동서를 갈라놓았던 문화와 생활의 차이는 거의 사라졌다. 이제는 동독의 존재를 느낄 만한 흔적을 일상생활에서 찾기가 어려워졌다. 수도 베를린에 위치한 민간 ‘동독박물관(DDR Museum)’은 동독에 대한 향수(Ostalgie)를 간직한 곳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슈테판 볼레 동독박물관 연구소장을 만나 독일 통일 당시의 감격과 동독인들의 과거에 대한 향수, 통일 이후의 생활에 대해 물어봤다. ??


-동독박물관은 어떤 곳인가. “주로 과거 동독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당시 동독 주민들의 일상생활은 우리들의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이다. 그런 기억들을 동독의 정치체제와 어떻게 엮어내는가가 문제였다.”


-주 방문객은 누구인가. “흥미롭게도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온다. 아마 분단 국가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오는 것 같다. 물론 동·서독 출신을 불문하고 많은 독일인과 외국 관광객들도 방문한다.”


-서울에도 동독박물관과 유사한 ‘북한박물관’을 지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서울에 ‘북한박물관’이 생긴다면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다. ‘북한박물관’은 북한의 사회와 문화 같은 북한 관련 주제를 다루는 것은 물론 분단의 역사도 담아야 한다. 과정은 어렵겠지만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해인 1989년 동독에서 분 자유와 민주주의 바람의 배경은. “동독에는 정부에 저항하는 소규모의 반대 세력이 존재했다. 이들은 주로 교회의 조그마한 방에 모여 활동했다. 교회에서는 인권과 같은 주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다. 교회의 낡은 프린터를 이용해 전단과 신문 등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곳을 ‘독립출판소’라고 불렀다. 당시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개혁·개방) 정책과 동유럽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닥쳤던 경제적 시련 등의 요인도 영향을 주었다.”


-소규모의 반대 세력이 어떻게 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었나. “당시 동독을 탈출해 헝가리 부다페스트나 체코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에 진입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인터뷰가 TV 전파를 통해 전달되면서 동독의 극심한 위기가 알려졌다. 이에 발맞춰 소규모 반대 세력들도 개혁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해 발표했다. 선언문의 내용은 과격하거나 혁명적이지 않았다. 단지 정부와 인민들 사이의 소통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정부가 인민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언문들은 교회를 비롯한 마을 곳곳에 붙었다. 반대 세력이 발행한 최초의 대규모 출판물이었다. 정부는 이를 단속했다.”


-동독 대중의 반응은. “89년 10월 7일에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 열병식이 있었다. 이틀 뒤인 10월 9일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등지에서 정부에 저항하는 최초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른바 ‘월요시위’였다. 시위는 교회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확산됐고, 결국 정권의 종말로 이어졌다.”


-시위대의 요구 중 통일도 있었나. “반대 세력이 동·서독 통일을 위해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 주된 요구는 민주주의와 자유, 경제개혁 등이었다. 동독 내부 문제에 대한 정치적 견해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대규모 시위는 통일 요구 확산을 촉발시킨 전환점이었다. 통일 요구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2월의 일이다. 시위대는 “우리는 하나, 우리는 독일인”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통일에 대한 동독인들의 생각은. “세대별로 통일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내 아버지 세대는 영국·프랑스·소련 등 주변국이 절대 독일 통일에 찬성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젊은 세대는 다음 크리스마스에는 독일이 통일돼 있을 거라고 했다. 나와 같은 중간 세대는 통일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었다. 우선 동독 스스로 민주주의 혁명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서독 체제에 흡수돼서는 안 되고, 자생적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독의 동방정책(Ostpolitik)이 동독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 실효성이 있었나. “그렇다. 60년대 빌리 브란트 시대부터 이어져 온 서독의 동방정책은 ‘접근을 통한 변화’였다. 그 키워드는 화해였다. 동독의 형제 국가인 소련·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과의 접근과 화해였다. 정치적으로 신중하면서도 장기적 관점의 정책이었다. 지속적인 동서 화해 정책으로 인해 동·서독의 이질감은 남북한처럼 크지 않았다. 독일의 통일은 이러한 노력의 역사적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통일 후 25년이 지난 지금의 평가는. “독일은 여전히 동·서독 간의 경제적 격차가 존재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동독은 서독에 비해 실업률도 높고 수입도 적다. 민주주의 발전도 더디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이 역사적으로 성공적인 사례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독일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안정적이다.”


-동독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나. “통일 후 20년 동안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있었다. 동독은 우리의 어린 시절 기억이 있는 곳이다. 그땐 실업이라는 것도 없었고, 사회적인 안전망도 잘 갖춰져 있었다. 동독인들은 통일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하지만 현재 독일의 새 세대, 젊은 세대들은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고, 관용적이며 진보적인 세대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 조언한다면. “한반도 통일의 과정이 너무 장기화되지 않을지 걱정이다. 그러나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동·서독의 어느 누구도 단 며칠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비밀경찰이나 싱크탱크들도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었다. 역사는 매 순간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손기웅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정리=하준호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