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류’ 창시한 다케미야 “나만의 바둑 두고 싶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기사 이미지

중앙을 경영하는 자신만의 바둑을 창조한 다케미야 마사키 9단. 그는 “인생에서 저마다 방식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듯이, 집짓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나만의 바둑을 두고 싶었다”며 “새로운 발상을 밀고 나가다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한국기원]

기사 이미지

1990년 일본에서 열린 제3회 후지쓰배에서 다케미야 마사키 9단(왼쪽)과 조훈현 9단이 바둑을 두고 있다. 다케미야는 조 9단을 ‘자신의 바둑을 두는 기사’라고 인정했다. [중앙포토]

바둑은 집을 많이 짓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귀나 변을 차지하는 게 집을 내기 편하다. 쉽게 말하면 실속을 차리기 좋다. 반면 중앙은 집을 만들기도 어렵거니와 힘들게 집을 내도 허망하게 무너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과감히 중앙으로, 또 중앙으로 활보한 기사가 있었다. 바로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64) 9단이다.

바둑 1인자에게 듣는다 <7>
80~90년대 일본 바둑 최강자

우주류, 어떻게 만들었나
정석대로 두는 기계적 바둑 싫어
작은 실리보다 광대한 그림 원해

개성 찾기 어려운 요즘 바둑
조훈현·이세돌, 자기 기풍 있어
세상도 바둑처럼 다름 존중해야

 그의 바둑은 천원(天元·바둑판 한가운데 점)을 향한다. 대부분의 기사가 귀나 변에서 실리를 찾고 있을 때 그는 이에 연연하지 않고 중앙을 아우르는 세력을 쌓는다. 마치 지구를 떠나 우주를 향하듯 그의 바둑은 중앙을 거점으로 장대하게 펼쳐진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바둑을 ‘우주류(宇宙流)’라고 부른다.

 다케미야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풍으로 1980~90년대 초반 일본 바둑계를 평정한다. 당시 라이벌은 철저한 실리바둑으로 이른바 ‘지하철 바둑’을 구사했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 이들은 정반대의 기풍으로 일본 바둑의 양대 산맥을 구축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벌써 20여 년이 지났건만 바둑 팬들은 개성이 살아 꿈틀대던 그 시절의 바둑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지난 17일 한·일 프로기사 골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다케미야를 만나 그의 바둑과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아르헨티나 탱고에 빠져서 매일 춤을 춘다. 일주일에 세 번, 1시간 반 정도 프로에게 레슨을 받는다. 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춤을 추는 파티에 자주 참석해 춤을 춘다.”

 - 탱고에 빠지기 전에는 어떤 취미가 있었는가.

 “사교춤·마작·골프 등을 배웠다. 무엇이든 한번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빠져서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다.”

 - 요즘 바둑도 두는가.

 “한창 선수로 활동할 때만큼 바둑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끔 바둑을 두곤 한다.”

 -‘우주류’는 어떻게 탄생한 건가.

 “열네 살 입단할 당시만 해도 나는 실리를 추구하는 평범한 기풍의 소유자였다. 15~16세부터 단순하게 집을 짓는 바둑을 두기보다는 뭔가 재미있고 새로운 수를 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우주류의 시초였다.”

 - 우주류에는 어떤 철학이 담겨 있나.

 “‘다름’이다. 나는 누구나 가는 평범한 길은 가고 싶지 않다. 따라서 누구나 두는 바둑은 두고 싶지 않다.”

 - 정형화된 바둑을 거부하는 것인가.

 “그렇다. 특히 나는 정석대로 두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정석은 바둑판의 4분의 1을 차지하는데 그런 것은 절대 두지 않는다. 나는 나만의 바둑을 두고 싶은 거지 정석을 외워서 남들과 똑같은 바둑을 두고 싶은 게 아니다.”

 - 집을 많이 지어야 이기는 바둑에서 우주류는 불리한 작전 아닌가.

 “알고 있다. 나도 중앙 세력 작전을 펼치다가 한번에 무너지면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걸 각오하고 두는 것이다.”

 - 바둑도 게임이라 승패가 중요할 텐데.

 “물론 이기는 게 지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는 내 생각을 바둑판에 한 수 한 수 펼쳐 가면서 상대를 이겼을 때다. 사람들은 그저 이기기 위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바둑을 둔다. 하지만 그건 바둑이 아니다.”

 -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편인가.

 “ 의도한 대로 바둑을 뒀을 때는 비록 졌더라도 승부에 초연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렸던 대로 바둑이 되지 않았다면 이기더라도 기분이 좋지 않다. 더구나 상대의 실수로 바둑을 이겼을 때는 더욱 기분이 좋지 않다.”

 - 과거 바둑계와 현재 바둑계를 비교하자면.

 “개성이 사라졌다는 게 아쉽다. 예전에는 본인의 기풍대로 바둑을 두는 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이기기 위한 바둑을 두다 보니 기풍이 모두 비슷해졌다. 내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단점을 보완해야 하는데, 한두 번 두다 승률이 낮으면 본인의 스타일을 포기하는 거다. 그러다 보니 같은 기풍 내에서 실수가 적은 선수가 이기는 재미없는 바둑이 됐다.”

 - 자신의 바둑을 두는 기사를 꼽자면.

 “한국에는 조훈현·이세돌 9단, 일본에는 이야마 유타(井山裕太) 9단이 있다.”

 - 일본 바둑이 예전 같지 않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 사회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사가 많아졌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독보적인 1인자가 나온다면 다시 사람들이 바둑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야마 유타 9단에게서 그 희망을 보고 있다.”

 - 소원이 있다면.

 “바둑같이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바둑은 100명이 두면 100판 모두 다른 바둑이 나온다. 또 서로 다른 기풍이 만났을 때 더 재미있는 판이 벌어진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모두 다른 게 당연한 것이고, 다름이 만나야 조화와 시너지가 생긴다.”

 -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뜻인가.

 “그렇다. 현실에서는 일부 사람이 다름을 정치적으로 악용해 권력을 취하고 이익을 얻는다. 일본에서는 아베 정권이 군국주의를 추구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너무 안타까운 상황이다. 세상도 바둑처럼 인간의 다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었으면 한다.”

 - 바둑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다. 바둑에 빠지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신이 인간을 위해 하사한 특별한 선물이 아니라면 바둑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평창(강원도)=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다케미야 마사키 9단=1951년 일본 도쿄 출생. 65년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 문하 입문. 65년 입단. 1976·80·85~88년 본인방, 90~92년 십단전, 95년 명인전, 88~89년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89~92년 TV아시아선수권대회 타이틀 획득. 2006년 통산 1000승 달성.

ADVERTISEMENT
ADVERTISEMENT